Diplomacy
남아시아에서 서유럽으로의 이주: 기원, 경향,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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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Published in: Apr.05,2022
Apr.12, 2023
1947년 영국의 인도 식민 통치가 종식되면서 이전 통일되었던 힌두스탄의 영토가 인도와 파키스탄이라는 두 국가로 분리되었다. 독립 후 처음 수십 년 동안 이전 식민지에서 이전 식민 통치국 대도시로 엄청난 이주 움직임이 있었다. 영국의 이주 정책은 힌두스탄 반도에서 영국으로의 이주 흐름의 방향과 강도(强度)를 결정했다. 식민지 해방 이후 최초의 이주 흐름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대부분 낮은 스펙을 가진 노동자의 추가 유입에 대한 영국의 관심, 식민지에서 모국으로의 자유로운 인간 이동의 관행(1947년 이전에 존재함), 영연방 국가의 시민이 거주 국가를 선택하고 영국에 자체 회사를 가질 수 있도록 허용하는 영국 이민 정책의 특징. 인도에서 온 이주민의 대다수는 식민 군대와 경찰 부대에서 복무한 소작농(주로 중산층 농장) 출신의 시크교인과 그들의 친척이었다.
영국 의회에서 1962년과 1968년 영국 영연방 이민법을 채택하기 이전에는 영연방 시민으로서 인도인은 이전 식민 통치국인 영국 대도시의 영토에 무제한으로 들어갈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 새로 도착한 많은 사람들이 레스터나 버밍엄과 같은 산업 중심지에 정착했다. 새로 도착한 이민자들은 섬유 및 서비스 산업에 고용되었다. 그들 중 상당 수는 런던 서부에 위치한 히드로 공항 서비스 부문에 고용되었다. 영연방 국가에서 영국 본토로 이주하는 자유를 제한한 1962년 법은 실제로 이미 인도와 다른 남아시아 국가에서 온 이민자들이 영국 영토에 정착하도록 장려하였다. 곧 그들의 가족이 첫 이민자와 합류했다. 1960년대 중반까지 영국에 도착한 대부분의 인도인은 영국 정부 통계에 따르면 "부양가족"으로 분류되었다. 부양가족은 1965년 이민자의 75%, 1966년 80%를 차지했다. 인도에서 영국 대도시로의 이민은 영국에 도착한 사람 수가 23,000명을 초과한 1968년에 최고조에 달했다. 1995년과 2005년 사이에 인도로부터의 이민이 급격히 증가했다.
인구 조사 자료에 따르면, 인도 이민자의 수는 1961년에서 2001년 사이에 166,000명에서 470,000명으로 세 배 증가했다. 엄격하게 말하면, 인도에서 태어난 영국인도 이민자였다. 2001년 영국의 인도인 커뮤니티는 약 100만 명에 달했으며 그 중 약 5분의 1은 남아프리카와 이전 동아프리카 식민지에서 왔다. 2007년 영국에 거주하는 인도인의 수는 130만 명으로 증가했다.
1990년대 초반까지 영국 대도시는 인도 이민자들의 주요 안식처가 되었지만 점차 이들 이민자들의 유입은 서유럽으로 확대되기 시작했고 나아가 동유럽으로 확산되었다. 1995~2005년 동안 인도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이주민의 약 절반이 결국 영국에 정착했다. 나머지 인도 이민자의 각각 18%와 12%는 다른 유럽연합 국가, 주로 독일과 이탈리아를 선호했다. 영국 이주민에 대한 검토 기간 동안 벨기에와 스웨덴으로 이주하는 인도인의 수가 느리긴 하지만 증가했다. 연간 약 1,000명의 인도인이 프랑스에 정착했으며, 2000년대 중반까지 약 65,000명이었던 인도 공동체는 주로 마다가스카르, 세이셸, 레위니옹, 모리셔스 출신의 인도인으로 구성되었다.
인도 그리고 영국과 문화적으로 관련된 다른 국가로부터의 이주 흐름이 강화되는 이유를 더 잘 이해하려면 많은 유럽 정부가 의도적으로 추구한 정책을 상기해 볼 가치가 있다. 그 정책의 핵심은 "세계에서 가장 큰 민주주의 국가" 인 인도 출신의 기술도 좋고 값싼 노동자를 초청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2000년부터 2005년 까지 독일에서 시행된 임시 "영주권" 이주 이니셔티브는 처음 인도 정보 기술 전문가를 유치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처음에 아펜니노 산맥에 불법적으로 입국한 사람들로부터 인도 공동체가 형성되었고, 이후에 이들에게 이탈리아에 머물 수 있는 법적 근거를 제공했다. 이탈리아에 거주하는 인도 이민자의 대다수는 낙농 농장 및 기타 농업 분야에서 일하는 펀잡 출신이다.
인도의 정보 기술 및 관련 산업 클러스터의 발전, 인도 공과 대학 졸업생의 고품질 전문 교육 경험- 이러한 요소 및 기타 요인 때문에 미국, 서유럽 및 호주는 인도 출신 숙련된 노동력을 유치하려고 하였다. 이미 2000년에 영국 정보 기술 분야 이민자의 1/3 이상이 인도 출신이었다. 2000-2004년에 245,000명 이상의 정보 기술 분야 이민자들이 미국에 정착했다. 이런 종류의 "이주 경쟁" 에서 인도는 멕시코, 중국, 필리핀에 이어 두 번째를 차지했다.
영국에서는 2004년 10월 물리학, 수학 및 공학 분야에서 성공적인 인도 학생(및 다른 영연방 국가 출신)을 "귀화" 시키기 위한 프로그램이 채택되었다. 귀화 프로그램은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및 네팔 출신 자연 과학 및 정밀 과학 분야의 미래 전문가를 영국으로 데려오기 위한 추가적인 유인책이 되었다. 동시에 이 귀화 프로그램은 영국으로의 이민을 관리하기 위한 도구가 되었다.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아일랜드,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가 이 관행을 따르고 있다.
지적 부가가치 비중이 높은 외국인 노동력에 대한 수요는 궁극적으로 서유럽 국가 인구의 사회-인구구조 특성에 따라 결정된다. 현재 유럽연합에서 역사적으로"핵심" 역할을 한 국가에서 인력의 급속한 "고령화"로 이들 국가 정부 기관은 이러한 도구를 사용하여 "지식 경제"의 미래 근로자를 유치하려 한다. 동시에 외국 출신 "지적 생산 노동자"를 사용하는 것은 서유럽 국가에 영구적 으로 머물지 않는 이들 노동자가 적절한 지식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인도와 남아시아 국가에서 서유럽으로의 인적 자본 이동은 유럽 엘리트의 관점에서 두 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다. 1) 세계 경제에서 서유럽 경제의 경쟁력을 높이고 동시에 2) 정보 기술 산업 발전을 위한 국가 모델 선택에 있어 남아시아 국가들의 기술 독립성을 빼앗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인적자본 유형의 이주에도 제한이 있다. 유럽연합 당국은 인도 및 기타 국가(남아시아 뿐만 아니라)에서 지적 부가가치가 높은 노동력을 대규모로 수입하면 미래에 정보 기술 분야의 발전과 경제에서 이들 기술의 응용이 필요한 서유럽 국가의 국립 과학 학교의 재생산을 저해할 수 있음을 심각하게 두려워 한다. 마지막으로, 유럽연합 국가들의 이주 정책 형성에 있어 정치적 요인도 다소 영향을 미친다. 왜냐하면 국가 포퓰리즘을 지지하는 정치 세력이 서유럽이 아닌 다른 문화권에서 온 이주민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영국으로 이주하는 파키스탄 이민자의 상당 부분은 아자드 카슈미르 (현재 파키스탄이 통제하는 지역)의 Mirpur 지역 출신이다. Mirpur 지역은 오랜 이민 역사를 가지고 있다. Mirpur 출신들은 모항이 봄베이와 카라치인 영국 선박에서 화부로 일했다. 그 후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그들 중 일부는 영국에 정착했다. 세계대전 이후 파키스탄 이민자들은 랭카스터, 요크셔, 맨체스트 및 브래드포드의 섬유 공장, 웨스트 미드랜드와 가장 큰 도시인 브밍햄의 자동차 공장에서 일자리를 얻었고 루톤과 슬라우와 같은 도시의 경공업 개발 구역에서 일했다. 파키스탄에서 온 다른 이민자 그룹 중에서는 글래스고, 버밍엄, 종종 "리틀 펀잡"라고 불리는 런던 서부 지역인 사우스홀에 주로 정착한 펀잡인을 골라내는 것이 관례이다.
방글라데시에서 영국으로의 이주는 주로 1970년대 상반기에 발생했다. 이들의 이주는 신생 국가인 방글라데시에서의 불안정 때문에 이루어졌고 방글라데시-인도 국경 바로 근처에 위치한 방글라데시 북동부의 Sylhet 지역에 주로 영향을 미쳤다. 처음 방글라데시 이민자들은 영국 전역에 있는 제철소와 섬유 공장에 고용되었지만 경제 위기로 인해 이러한 기업이 문을 닫은 후에는 식당 사업을 포함하여 주로 양복점과 케이터링 분야의 소규모 사업을 하게 되었다. 방글라데시에서 온 많은 사람들은 그 당시 빠르게 발전하고 있던 인도 레스토랑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그 중 상당 부분을 인수했다.
상대적으로 발전된 스리랑카(1972년 이전-실론)에서 영국으로의 첫 번째 이주는 1960~1970년대에 발생했고 규모도 크지 않았다. 영국에 도착한 스리랑카 이민자들은 영국 국민 건강 서비스뿐만 아니라 사무직 노동자가 일하는 분야에 고용되어 평직원, 하위 관리자, 상위 관리자가 되었다. 영국에 온 스리랑카 이민자들은 부유한 가정 출신이었고 좋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영국에서 자신의 능력을 빠르게 사용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두 번째 스리랑카인의 영국 이주는 1980년대에 발생했으며, 주된 이주 원인은 당시 스리랑카를 휩쓸었던 내전이었다. 상당수의 부유한 스리랑카 타밀인들은 영국 대도시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2세대 스리랑카 이민자들은 전임자들만큼 부유한 가정 출신은 아니었지만, 서구 사회로 온 많은 난민들처럼 영국 사회의 "하층 계급"에 속하지는 않았다. 스리랑카인들은 서비스 산업의 전통적인 부문인 상점과 식당에 고용되어 있으며 그들 중 일부는 자신의 사업을 시작하기도 했다.
"남반구"에서 "북반부"로의 인구 이동 강도(强度) 에 대한 상당한 조정이 "절단된 세계화" 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는 주로 미국, 서유럽, 일본의 세계 경제의 지도자들과 그 외 나머지 국가 지도자들 간 모순을 더욱 악화시켰다). "절단된 세계화"는 세계의 주요 부분인 전환 사회의 능동적 반응과 ("열정적인" 반세계화 운동 및 프로젝트)과 수동적 (유럽연합의 "핵심 국가"로의 이주 흐름의 강화) 반응을 모두 낳았다.
과도기 사회에서 산업화된 국가로의 주요 이주 "회랑"은 미래에도 주요 방향을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남반구"의 인구 통계학적 과정이 향후 수십 년 동안 미래 세대에 계속해서 이주 압력을 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도 (그리고 넓은 의미의 남아시아)는 여전히 가장 많은 수의 국제 이민자들의 출신 지역이다. 1,750만 명의 인도인이 해외에 살고 있다.
노동력 잉여가 많은 남아시아 국가의 경우, 이주는 노동 시장의 긴장을 완화하는 동시에 송금을 통해 이들 국가의 빈곤 완화에 기여한다. 따라서 남아시아 지역의 국가들이 세계에서 가장 큰 송금액을 받는 국가로 남아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2018년 파키스탄, 스리랑카, 방글라데시와 같은 국가에서 해외 송금액이 이들 국가 GDP의 5%를 초과했다. 또한 남아시아 국가의 내부 이주 요인에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2001-2011 기간 동안 이들 국가의 도시 인구는 1억3천만 명 증가했으며 이러한 인구 증가는 해외 이주에 대한 추가적 동기가 되었다. 남아시아에서 온 불법 이민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목적지는 서유럽, 북미 및 오세아니아이다. 인구통계학자들은 서유럽으로 향하는 남아시아 이주자들이 주로 중앙아시아와 러시아 연방을 통해 서유럽으로 밀입국하지만 중동을 거쳐 서부 발칸 반도로 향하기도 한다고 지적한다. 마지막으로, 주로 방글라데시, 인도, 파키스탄에 영향을 미치는 자연재해의 끊임없는 위험으로 인해 남아시아인들은 서유럽과 걸프 지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분명히 남아시아의 도시 인구 중 가장 사회화되고 적응된 그룹은 삶의 방식을 바꿀 준비가 되어 있다.
2019년 현재 영국에서 가장 큰 이주민 그룹은 인도, 폴란드, 파키스탄 출신 이민자였다. 영국, 프랑스, 독일에서는 이민자들의 높은 수준의 인적 자본과 혁신 활동 사이에 긍정적 상관관계가 있다. 거대한 이주 흐름은 서유럽에서 국가 포퓰리즘 세력의 활성화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그래서 2015년 이주 위기 이후 극우 정당의 영향력은 중도파와 사회민주당으로부터 다시 자리를 되찾으면서 급속도로 커지고 있다. "인민 정당"은 "다른 문명을 가진 국가 출신"의 서유럽 국가로의 유입 증가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을 포함하여 인구의 다양한 부분을 통합하면서 점점 더 성공하고 있다. 따라서 전통적인 정당의 정책은 국가 포퓰리즘 세력의 영향력 증가에 기여한다.
전통적인 정당들은 숙련된 노동력의 부족이 증가함에 따라 노동 시장을 통합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이민자를 받아들이는 그들의 정책을 정당화한다. 전통주의자들에 따르면, 노동 시장의 통합은 사회의 경제적 생존력을 강화하고 정치 제도의 생존력을 높이는 것은 물론 이민자들이 새로 정착한 사회에 속해 있다는 느낌을 주는 그런 당연한 결과를 가져온다. 서유럽 사회에서 이민자의 사회 경제적(문화적) 적응 문제는 여전히 심각하다. 2017년 유럽연합에서 이민자의 실업률은 13.3% 였고, 현지국가 출신 인구 중 실업률은 6.9% 를 초과하지 않았다.
코로나 팬데믹은 이주 흐름의 강도(强度)에 큰 조정을 가져왔다. IMF 블로그에 따르면 코로나 대유행의 결과로 “이주 흐름이 갑자기 멈췄다. 대(大) 봉쇄는 일시적이지만, 코로나 전염병은 외부 세계에 대한 개방에 관해 배타성과 불신감을 강화시키고 이민자를 받아들이는 문제에 대해 국가에 더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민자의 도착국에서의 이민 감소와 높은 실업률은 이주민 출신 국가, 특히 이주 노동자들이 본국으로 보내는 송금에 크게 의존하는 가난한 국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주 비용에는 지리적 장벽 및 언어 장벽을 극복해야 할 필요성도 포함된다. 이주민이 정착하는 국가의 경제 시스템에 통합된다는 것은 해당국 언어의 철저한 숙달을 의미하며, 이는 이민자들이 해당국의 문화 및 사회적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방글라데시에서 온 이민자들은 아펜니노 반도에 잘 적응했는데 그 이유는 남아시아 출신자에게는 힘든 이탈리아어를 방글라데시에서 온 이민자들은 숙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탈리아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방글라데시 사람들은 인도 사람들보다 더 근면하고 덜 가식적이며 가장 불리한 노동조건에서도 일할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방글라데시에서 온 이주민은 이탈리아인에게 경제적으로 유익하다. 경공업 기술을 갖춘 방글라데시 이민자는 특히 외국인들이 높이 평가하는 "Made in Italy" 상표가 붙은 제품을 제조하는 섬유 기업 직원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아펜니노 반도에서 환영받는 "손님" 이다.
그러나 다른 위험들이 이민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서구 국가로 이주하는 이민자들은 이주와 관련된 비용을 지불할 자금이 부족하여 종종 "빈곤의 덫"에 빠진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들은 전체 고용 대비 이민자 유입이 1% 증가하면 이민자가 새로운 장소에 재정착한 5년차 까지 생산이 거의 1% 증가한다고 믿고 있다. 서유럽으로 이주하려는 남아시아인의 욕구가 큰 것은 신흥 시장 및 전환기 국가로의 이주의 경우 현지 저개발 국가의 시장 조건에 적응하기 어려워 노동 생산성 증가의 긍정적인 영향이 잘 관찰되지 않기 때문일 수 있다. 이주는 또한 노동 시장의 일부 부문에서 현지 근로자(또는 이미 서유럽에 정착한 동유럽 및 중부 유럽인)가 물질적으로 손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에 이주민이 정착한 국가의 소득 분배 영역에서 적어도 일시적으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서유럽 국가로의 이주 및 이들 국가의 이주 정책은 계속해서 지난 수십 년간의 경험의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이전 식민지에서 전후 서유럽으로의 이주는 식민지-모국의 경로를 따라 이동하는 수세기에 걸친 경험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유럽 경제를 현대화하기 위해 필요한 상대적으로 저렴한 노동력에 대한 수요에 의해 이루어졌다. 네덜란드 왕국과 같은 일부 이전 식민 세력들은 그들의 동부 식민지(인도네시아)에서 남미(수리남)로의 노동 이동에 관여했다.
역사적 경험은 프랑스의 이주 정책에도 보이지 않게 존재한다. 1930 년대 프랑스 인구의 거의 1/3이 이민자 지위에 있었고, 이들은 주로 남유럽 국가에서 온 이민자였다. 이민에 대한 과거의 기억은 과거 프랑스 제국주의의 이주 결과와 결합하여 반(反)이민 정당 현상을 낳았다. 반(反)이민 포퓰리즘 세력의 영향력 증가는 이미 1990년대 에 관찰되었다. 그 후 극우 정당 국민전선(National Front)이 빠르게 영향력을 얻었다. 반이민 포퓰리즘의 도전에 대응하듯 발라두르가 이끄는 우익 정부는 정치적 이유로 이민을 최대한 제한하고 이민을 최소화하기 위해 강경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 이후 이주 정책은 다소 완화되었지만 프랑스 입국은 엄격하게 통제되었고, 노동 시장 은 엄격하게 규제되었다. 또 다른 식민제국인 대영(大英)제국 당국도 프랑스와 거의 같은 방식으로 행동하여 높은 스펙을 갖춘 이주민에 대해선 자유주의 노선을 추구하고 반대로 정치적 이유로 이주하는 난민에 대해선 엄격한 제한 조치를 시행했다.
인도 및 기타 남아시아 국가에서 서유럽 국가로 이주한 이민자들의 재정착 전망을 평가할 때 유럽연합 요소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유럽연합 요소는 이주민의 이동에 대한 제도적 규칙의 통합으로 새로운 이주 공간을 구축하는 데 핵심 요소가 되며 또한 이주민의 이동 패턴을 구축하는 데 핵심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이주가 유럽 선진국의 인구 문제에 대한 장기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는 것이 중요하다. 프랑스, 아일랜드, 영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연합 회원국은 향후 수십 년 동안 노동 가능 인구가 크게 감소할 운명에 처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전문가에 따르면 유럽연합 국가의 노동 시장은 미국보다 변화하는 상황과 관련하여 더 비(非)활성적이고 덜 유연하다.
향후 이민을 고려하는 잠재적 이민자들은 유럽연합 주요 국가에서 증가하는 이주민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이민을 받아들이는 국가의 태도는 나라마다 다르다. 남유럽 국가들(스페인, 그리스, 포르투갈)에서는 이주를 비난하지 않는"허용적인" 정치 문화가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2000년 이후 유럽연합에 도착한 이주민의 거의 절반이 스페인에서 유럽으로 이주를 시작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스페인에서도 이제 일반 시민들은 새 이민자들을 사회경제적 도전일 뿐만 아니라 문화적,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하고 있다. 영국은 1990년대 초부터 난민과 이주민의 수를 가능한 한 많이 제한하는 정책을 시행해 왔다. 때때로 영국 당국은 주택 문제의 악화와 런던과 영국 남동부의 사회적 긴장 증가를 반(反)이민 조치를 취하는 일상적인 이유로 내세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서유럽으로 이주하기 위해 이민자들이 선호하는 목적지 중 하나이다.
더욱이 서유럽 국가들의 이민정책 자체가 여전히 모순적이다. 한편으로는 자국내 반(反)이민 여론을 달래고자 하는 욕구 때문에 불법 이주에 대해 강경한 목소리를 내지만 또 다른 한편, 자국 경제에 필요한 숙련된 노동력을 유치하려는 욕구는 이주민의 일시적인 체류 성격을 강조하도록 지시하는데, 이는 시민권이나 영주권을 부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2년 이후 유럽연합 국가로 이주한 사람들의 수는 150만 명에서 200만 명에 달한다.
다시 말해, 국민국가의 기능 원칙과 정착민들이 옹호하는 다문화 주의의 지도 원칙(이주민이 정착한 국가에서 인종간 관계를 관리 하는 방법으로서) 사이의 갈등은 많은 유럽 국가들의 정치 발전의 필수적인 부분이 되고 있다. 동화(同化)의 원리와 다문화주의의 대립은 서구 전체의 사회정치적 발전의 축이 된다. 최근까지 다문화주의는 스칸디나비아 국가의 이주민에 대한 태도에 강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리스, 오스트리아, 폴란드 및 헝가리에서는 동화주의 분위기가 분명해졌다. 유럽연합 내, 특히 스웨덴에서는 "다문화적 합의"가 점점 더 힘을 발휘하고 있다. 영국, 프랑스 및 네덜란드에서도 유사한 경향이 관찰된다. 단순히 이주민의 수를 계산하는 것은 때때로 오해의 소지가 있다. 이주민의 수가 가장 많은 국가는 대(大)국 (독일, 프랑스, 스페인, 영국)이며, 이주민 비율이 가장 높은 국가는 소(小)국 (오스트리아, 덴마크, 네덜란드, 스위스)인데 이러한 이주민의 수는 정치 영역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미친다. 많은 국가에서는 세속주의의 신성한 원칙이라는 이름 하에 거주 인구의 소속 종교에 대한 통계를 작성하지 않는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2001년 영국에서는 주로 인도와 남아시아로부터의 이주를 통제하기 위해 인구의 ‘고백적 정체성’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프랑스와 독일의 인구 조사에서는 소속 종교에 대해 기록하지 않았다.
다문화주의와 동화주의 원칙의 비율에 따라 유럽 국가를 여러 그룹으로 구분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다.
다문화주의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국가(독일, 프랑스, 그리스, 덴마크, 오스트리아, 포르투갈, 핀란드, 아일랜드). 동시에 이탈리아, 핀란드, 독일, 아일랜드는 고대부터 이들 국가에 밀집해서 살고 있는 소수 민족과 관련하여 이중 언어 사용을 허가한다. 하지만 이 원칙은 이주민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여러 언어에 "언어 권한"을 위임한 국가(스페인, 스위스, 벨기에). 벨기에가 프랑스인과 플랑드르인에 대해 상정된 언어 지위를 부여하는 것과 스페인이 카탈로니아인과 바스크인에 대해 유사한 법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이들 국가에서 분리주의를 막기 위한 것이며 이민자의 언어적 의사소통 수단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다문화주의가 존재했던 국가(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로 구성된 영국 연방)는 영국 연방이지만 이민자에게는 이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세속적 이민자에 대한 상세한 정책을 가진 국가(스웨덴, 노르웨이). 이들 국가는 다양한 사회 정치적 세력에 의해 광범위한 비판을 받고 있다.
처음에는 다문화주의를 받아들였다가 나중에는 거부한 국가들 (네덜란드). 한편으로, 다문화주의의 최대 중심지인 네덜란드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에서는 이주민을 돕는 특별 서비스가 유지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국가의 주요 사회 정치적 세력과 그들의 이익을 표현하는 네덜란드 정당들은 "남반구"로 부터의 이주 뿐만 아니라 추가적인 이주 자체에 강력 반대한다.
동화주의와 다문화주의 원칙에 대한 태도는 다양한 사회세력의 생활 태도와 실천 활동에서도 나타난다. 자유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는 다문화주의 담론을 선호하는 반면, 보수주의자는 자신을 민족국가의 가치, 기독교 윤리, 민족문화의 수호자로 내세운다. 그러나 이러한 이분법은 한편으로 정치적 스펙트럼에서는 좌파에 속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외국인 노동자의 이주와 정착국 내 이민자의 적응에 대응하기 위한 정치적 발전의 논리에 의해 갈등하는 노동조합의 모순적 입장에서 명확한 특징과 뉘앙스를 획득한다. 문화적 성향과 태도에 있어서는 보수적이지만 동시에 "고령화 사회"의 부족한 인구학적 잠재력을"보충"하는 요인으로서 외국인 노동자 수입에 관심을 갖고 있고 또한 외국인 노동자를 특정 서유럽 국가 내의 경제 성장을 위한 도구로서 생각하는 비즈니스 커뮤니티의 이주에 대한 태도는 상당한 독창적 견해를 가지고 있다.
새로 도착하는 이민자에 대한 정착국 주민들의 초기 비(非)우호적인 반응은 전적으로 경제적인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나타나는데, 말하자면 이들 이주민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초창기 이주 정착민은 국가 문화와 국가 정체성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그러나 난민들이 새로운 곳에 정착하고, 그 가족들이 늘어나고, 종교 건축물이 세워지고, 유럽 정치가 활발히 개입하면서 이주민에 대한 유럽인들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유럽에서 헌팅턴 하버드대 교수가 주창한 "문명의 충돌"이 심화되었다. 1958년 대영제국에서 일어난 "인종 폭동"은 문명에 기반한 분쟁이 고조된 역사적 출발점으로 간주될 수 있다. 영국으로 온 대부분의 이주민들은 대영제국의 신민의 지위를 가졌고, 이로 인해 그들이 정치 영역에 진입하는 것이 확실히 용이하게 되었다. 인종은 적어도 1990년대 후반까지 영국의 다문화주의 문제의 핵심이었다.
처음 서유럽에서 근본적으로 다른 행동 모델로서 종교라는 요소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런데 현재 일부 정치인 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슬람 가치 체계에 뿌리를 둔 이슬람 급진주의와 테러리즘의 확산이 일종의 분수령이 되었다. 이들 정치인의 생각의 본질은 이슬람이 일반적으로 서구, 특히 기독교 및 민주주의와 "영원한 전쟁" 상태에 있다는 주장이다. 이런 정서는 중동과 중앙아시아에 대한 반(反)이슬람 이야기를 정기적으로 발행하는 서유럽 언론의 일부에 의해 지지된다.
서유럽 국가 정당의 이주민 문제에 대한 입장 변화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 국가 문화의 존재 이유, 유럽의 정치적 가치에 대한 동화 및 충성의 원칙이 강화되었다.
- 정치적 난민에 대한 관심 증가를 포함하여 이민 절차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고 있다.
- 외국인의 유럽연합 국가로의 이동에 대한 통제 분야에서 관련 유럽 국가의 이민 당국 간 "수평적인" 상호 작용과 협조가 강화 되고 있다.
- 다문화주의의 원칙과"보편적 가치"의 개념에서 서유럽의 정치 엘리트에 대한 실제 거부가 있다.
- 이주 정책의"합리적인" (즉, 의도적으로 복잡한) 개념을 유럽연합 국가의 삶에 도입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 이주 과정을 감독하는 조직의 자원과 정치적 권한이 증가하고 있다.
인종 평등 원칙과 이주민의 종교 의식 관행을 공식적으로 폐지하지 않은 서유럽 엘리트의 이러한 조치는 실제론 다문화주의 원칙의 추가 발전을 배제한다. 또한 이주민의 상황은 정통 무슬림 활동가들이 종교 의식 분야에서 정착국 당국과 타협하려고 하지 않아 서유럽에서 다문화주의 지지자들의 지위를 훼손함으로써 복잡해졌다.
현재 상황에서 다문화주의에 대한 전투적 반대자들은 서유럽의 무직자와 부랑자 뿐만 아니라 기독교 가치를 옹호하는 중산층 및 반(反)이민 정당의 지원을 얻기 위해 이들에게 눈길을 주고 있다. 무슬림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2001년에 시작된 서구의 "테러와의 전쟁"이 "이슬람과의 전쟁" 으로 확대되었다고 믿고 있다. 소규모 유럽연합 국가에서는 외국 문화에 "흡수"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지속적으로 급진적인 반(反)이민 정서를 부채질하고 있다.
21세기 초의 여러 사건 (2001년 9월 11일 미국 테러,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 서유럽과 남유럽 국가의 테러 공격 등) 과 2015년-2016년 유럽 이주 위기는 이주민들에게 불리한 유럽연합 지도자들의 대중 의식 변화의 토대를 마련했다. 다문화주의의 지배는 이해관계의 통일성과 기독교 문화의 규범으로 묶인 공동체로서의 국민국가라는 개념으로 대체되었다. 현재 서유럽 인구의 광범위한 부분에서 사회 생활의 기본 원칙이 지속적으로 침식되어 사회의 고결성이 훼손되고 있다는 생각이 강화되고 있다. 그래서 현재의 고학력 이민자조차 국가적 사회 통합에 위협이 되는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하고 있다. 이러한 사고 방식은 서구 사회의 번영과 안전을 동시에 보장할 수 있는 힘으로서 한때 안정적이었던 다문화주의 개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체계적인 경제 위기에 의해 끊임없이 촉발된다.
2015-2016년의 이주 위기는 이주 문제를 주요 서유럽 국가들의 내부 생활에서 중심적인 정치적 이슈로 만들었다. 다른 문화권의 이민자가 유럽연합으로 유입되는 것을 막는 강력한 제한 조치를 옹호하는 사회 정치적 세력과 정당들은 이러한 새로운 상황에서 점점 더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남아시아 국가에서 서유럽 으로 오는 이민자의 재정착은 계속되고 있으며 이는 네덜란드와 이탈리아의 사례에서 확인된다. 인도 및 기타 남아시아 국가에서 이 두 나라로의 이주는 본질적으로 대부분 "생산적" 이라 할 수 있다. 네덜란드의 경우, 정보 기술 부문에서 양질의 노동력 유입이 중요한 반면 이탈리아는 농업 산업 분야에서 "인구학적 배당금"이 필요하다.
빠르게 성장하는 정보 기술 클러스터를 위해 자격을 갖춘 인력이 필요한 네덜란드에서는 인도에서 교육받은 이민자들이 경제의 중요한 부분에서 이민 정책의 자유화로부터 혜택을 받았다. 사실, 네덜란드에서는 이주 문제와 관련해 일종의 ‘다모클레스 검’과 같은 일발의 위기 상황은 정지되어 있다. 그러나 2004년 북아프리카 출신에 의해 영화감독 테오 반 고흐가 살해된 사건은 전통적으로 "관용의 집"으로 명성이 높은 네덜란드에서 반(反)이민 정서의 성장을 가져왔다.
네덜란드의 숙련 노동자에 대한 수요는 유럽연합 국가 평균보다 10% 높다. 서유럽의 다른 국가(주로 영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네덜란드에는 인도인이 가장 역동적으로 성장하는 이민자 그룹을 대표한다. 네덜란드의 인도 커뮤니티에는 정보 기술, 컨설팅 서비스, 엔지니어링 및 기업 인사 관리 분야에서 필요한 전문 교육을 받은 근로자가 많이 있다. 1980년대에 대규모 인도인의 네덜란드로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2010년대 초까지 약 22,000명의 인도인이 네덜란드에 살았다 (1996년 9,000명에 비해). 네덜란드 왕국은 우선 유리한 생활 환경, 높은 생활 수준, 영어의 광범위한 사용, 외국인에 대한 관대한 태도 등을 내세워 인도 출신 이주민들을 끌어들인다.
고등교육을 받은 젊은 인도인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네덜란드로 온다. 네덜란드 기업의 전통적인 채용 관행 이외에 네덜란드에서 인도 기업의 활동을 활성화시키는 요소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현재 정보 기술 분야를 중심으로 200개 이상의 인도 기업이 네덜란드에서 활동하고 있다. 한편으로 정보 기술 부문은 인도 경제 성장의 강력한 원동력이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 부문이 전체 인도 서비스. 수출의 45% 이상을 차지한다.
인도 노동력은 네덜란드에서 운영되는 다국적 기업(TNC)들이 인도에서 필요한 자격을 갖춘 프로필 인력을 적극 유치하고 있어 네덜란드로 많이 오고있다. 일부 네덜란드 사람들이 정보 기술 부문에서 특정 유형의 활동을 수행하는 것을 꺼리는 것도 인도 노동력 을 네덜란드로 이끌어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경우 영어를 사용할 수 있고 법을 준수하는 인도인이 아마도 이 부문의 고임금 직위에 가장 적합한 후보일 것이다. 즉, 네덜란드는 숙련되고 값비싼 인도 노동력을 자국으로 끌어들이는데, 이들 노동자의 초봉은 (2019년 초 기준) 월 4500 유로, 30세 미만 노동자의 경우 에는 월 3200 유로이다.
반면 이탈리아 경제는 유제품 생산량을 늘려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으며, 이는 주로 북부 펀잡 주에서 온 인도 노동자에게 고용 기회를 제공한다. 인도에서 온 많은 이주민들은 이탈리아 노동 시장의 성격과 이탈리아 사회의 특수성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 아펜니노 반도에 도착했다. 일부 이주민들은 이미 유럽연합에 있는 친척의 가족과 합류했다. 아펜니노 산맥에 도착한 펀잡 출신 인도인들은 농업 부문에서 일할 양질의 노동력이 부족한 산업 지대인 북부 이탈리아 지역에 빠르게 적응했다. 그러나 이것은 이탈리아 정부 기관의 유능한 개입으로 인해 노동 시장이 성공적으로 기능한 결과라기 보다는 운이 좋은 우연이었다.
인도인들은 최근 이탈리아로 관심을 돌렸다. 2003년 아펜니노 반도로 이주한 인도인의 총 수는 약 35,500명이었지만, 2018년에는 151,700명으로 4배 이상 증가했다. 그 결과 인도는 이제 유럽연합 국가로 이주하는 이주민 주요 "공급자" 목록에서 그 순위가 10위에서 6위 (非유럽연합 국가 중에서는 5위)로 올랐다. 이탈리아로 이주한 인도 이민자들의 주요 집중 구성도 다소 달라졌다. 2003년에 인도인들은 이탈리아 북부의 중부 지역과 로마에 집중적으로 정착했다면 현재 다양한 지역에 분산해 정착하고 있다. 인도인들은 주로 10개 주에 흩어져 살고 있는데, 가장 집중도가 높은 곳은 브레시아이다(이 지역 인구가 200,000명 인데 인도인은 14000명이다).
네덜란드와 달리 이탈리아로의 이주는 종종 계획되지 않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즉, 노동 시장의 특정 부문에서 상황에 따른 노동력 부족 또는 비(非)서구 국가로부터의 이주에 대한 이탈리아 이주 시스템의 상황적 반응의 결과로 이주가 이루어진다. 이탈리아에서는 다수의 인도인이 농공 단지 이외, 특히 산업 분야에서 저숙련 노동에 종사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산업 분야의 고용 비율 측면에서 살펴보면, 인도 이주민은 비(非)서구 국가에서 온 이주민 중에서 눈에 띌 정도로 많지는 않다. 2016년 기준 이탈리아 이주민의28.6%가 종사하는 농업 부문은 인도 이민자 (유럽연합 외부에서 온 총 노동력의 24.1%)가 일하는 주요 영역으로 남아 있다. 유럽연합 이외의 국가에서 온 자영업자 중에서 인도인의 비율 (2016년 7%)은 2007년 이후 거의 6배 증가했다.
농업은 이탈리아 경제에서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고 지속적으로 위축되고 있는 부문으로, 국가 GDP의 2%를 넘지 않으며 임금은 국가 경제 전체 수준의 절반에 불과하다. 그러나 농공단지의 잠재력을 평가할 때 뉘앙스가 중요하다. 이탈리아 경제에서 농업의 역할이 감소하는 반면 롬바르디아, 에밀리아로마냐 및 베네토의 농업 생산은 특히 인도 이민자들의 고된 노동으로 인해 증가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들 지역의 역동적인 개발은 유제품 생산에서 잘 나타난다.
그러한 예가 크레모나 지방의 행정 중심지인 크레모나 (인구 약 75,000명)이다. 인도인의 정착은 관광 비자를 사용한 1990년대 상반기에 시작되었다. 이 지역의 유제품 생산은 1960년대에 시작되었는데 이탈리아 농업 분야에서 노동력 수요를 급격히 감소시킨 기술 현대화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낙농 부문에서 노동력 공급 감소가 너무 커 해외에서 숙련된 노동력을 유치해야 했으며 이는 근면한 인도 펀잡인들에게 역사적인 기회였다. 인도 이주민들의 특별한 주요 공헌은 크레모나 지방의 치즈 산업 보존이었다. 다시 말해, 기후 조건과 온도 조건이 펀잡인들과 거의 완벽하게 일치하는 북부 이탈리아에서는 현장에서 일하는 전통이 필요했다.
마지막으로, 인도인의 근면, 주말과 공휴일 뿐만 아니라 초과 근무도 하겠다는 인도인의 의지는 이탈리아 고용주의 변함없는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인도인이 이탈리아에서 일하려는 데에는 그들 나름의 실질적인 이유가 있다. 한편으로 초과 근무를 통해 한 달에 최대 3,000 유로를 벌 수 있으며, "봉투" 로(이탈리아에서 일반적인 절차) 월급의 일부를 받을 수 있다. 따라서 소득이 증가하여 수입의 일부를 펀잡으로 보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미래에 투자하여 이탈리아 경제의 다양한 부문에 자신의 저축을 투자할 수 있다. 반면 농장에서 생활함으로써 인도인들은 이민자에 대한 차별을 포함하여 이탈리아 주택 시장의 변동을 피할 수 있다. 또한 고용주는 생산성 향상의 자극제로 작동하는 인도인 간의 가족 유대의 역할을 높이 평가한다.
이탈리아 고용주는 내적 균형, 공무 수행의 시간 엄수, 업무에 대한 열정과 같은 인도인의 자질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갖고 있으며, 또한 예를 들어, 이집트인과 모로코인과는 달리 인도인은 고용주 및 동료와의 갈등이 낮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인도 펀잡 지역은 역사적으로 고품질 노동력이 형성된 커뮤니티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이들의 자격은 국가 경제에 현대적인 생산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 전문적으로 훈련된 근로자가 부족한 인도 국경 너머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2015-2016년 유럽의 이주 위기는 이민자의 이동 경로와 "남반구" 에서 "북반구"로의 인적 흐름 자체의 강도를 크게 조정했다. 인도와 남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은 여전히 세계 이주 활동의 주요 원천 중 하나이다. 네덜란드와 이탈리아의 예는 남아시아 지역에 선진국의 경제 성장과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인구학적 배당금"이 있음을 보여준다. 네덜란드인과 이탈리아인들은 경쟁력 있는 인도인의 서비스를 이용한다. 이 경험은 아마도 "인구 배당금"을 수입해야 하는 러시아에서 사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 지도부와 관련 협상을 수행하는 인도 당국은 자격이 낮은 노동력을 수출하려 한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좋다. 이러한 양자 관계의 특정 영역에서 국가 이익을 수호하는 것은 인적 자본 수입에 대한 러시아의 실제 요구를 인도 측에서 더 잘 이해하는 데 기여할 것이며 세계에서 가장 큰 민주주의 국가인 인도와의 여러 다양한 협력에 대한 러시아의 진지한 태도를 확인시켜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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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rev Volodin은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 산하 세계경제와 국제관계에 관한 프리마코프 국가연구소(IMEMO)의 수석 연구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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