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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fense & Security

왜 부하리 대통령은 실패했나?

무함마두 부하리 나이지리아 대통령과 바바지데 산워-올루 라고스 주지사가 나이지리아 라고스에서 대통령 헬리콥터에서 손을 흔들고 있다.

Image Source : Shutterstock

by Ebenezer Obadare

First Published in: May.22,2023

May.30, 2023

나이지리아 국민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부하리 대통령이 공급해 주기를 바랐지만, 그는 국민들의 기대에 한참 못미쳤다.

 

아마도 나이지리아 역사상 다른 어떤 지도자도 모하마두 부하리가 2015년에 집권했을 때보다 취임 초기 국민들이 새 대통령에 대한 선의의 감정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그의 취임 당시 일반 대중들의 분위기는 더 이상 낙관적이고 좋을 수 없었다. 한편 나이지리아인들은 굿럭 조나단 대통령의 습관적인 안절부절에 질린 것 같았다. 조나단 대통령의 재임 기간 동안(2010~2015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나단 대통령은 점점 비정상적으로 보였고, 그래서 국민들은 그가 대통령으로서 더 이상 할 일이 없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반면 부하리는 1983-1985년 재임 기간 동안, 논란이 많았던 군부 통치자로서 역할을 마치고 다시 국가 지도자로 일할 준비가 된 것처럼 보였다. 그는 나이지리아 공직자에게는 드문 공명정대한 인물로 널리 인식되었다. 게다가  처음에는 그 위력을 경시했다가 2015년 선거가 다가옴에 따라 자신의 치하에서 급성장한 이슬람 반군 보코 하람의 무자비한 테러 행위가 판을 치자 이제서야 조나단 대통령이 절망속에서 필사적으로 남아공 용병에 도움을 요청하는 상황에서 부하리의 군부 경력은 필수적인 것처럼 보였다. 어쨌든 당시 나이지리아 유권자의 일부에게는 대통령 선거에 4번이나 출마할 만큼 절박한 사람(부하리는 이전 2003년, 2007년, 2011년 대선에 출마했으나 당선되지는 못했다)은 어떤 특별한 비밀스러운 계획 또는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부하리는 자신의 대선 후보직에 대해 국민들이 가졌던 열광적인 태도를 심각한 실망으로 바꾸어 놓았다. 옳든 그르든, 많은 사람들은 그의 정권에 대해 높은 희망을 품었지만 이제는 언제 이 정권이 끝날까 하고 그때만 기다리는 나이지리아 정치사에서 평판 붕괴의 대표적 사례가 되었다. 정권 초기, 내각을 구성하기 위한 투쟁이 특히 두드러지는 첫 몇 달 동안 부하리는 절박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았고 결국 대통령의 임무를 잘 수행해 나가길 바라는 국민들의 요구에 그가 제대로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했다.

 

또한 그는 당시 국가의 정치적 분열 상황이 분명히 그에게 요구했던 국민을 통합시키는 지도자로서의 역할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 같지 않았다. 2015년 7월 미국 평화연구소 (United States Institute of Peace)에서 국제 청중에게 연설하면서 부하리 대통령은 대선에서 자신에게 투표한 지역을 지지하지 않은 지역보다 더 선호할 것이라는 신호를 보냈다: “솔직히 말해서, 나에게 97% 지지를 보낸 유권자와 나에게 5%를 지지를 해 준 유권자가 어떤 이슈에서 동등하게 취급될 수 없다. 이것이 정치적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부하리 대통령은 나이지리아 남동부 Igbo 지역에서 가장 낮은 득표율을 기록했다.

 

공정하게 얘기한다면, 부하리 대통령은 ‘실패한 정권’이라는 평가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우선 경제는 부하리가 8년 전 취임했을 때 보다 훨씬 나쁜 상태에 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나이지리아는 2001년에서 2014년 사이에 평균 7%의 성장률을 기록하며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상위 15개 경제 중 하나”였다. 하지만, 2015년 “유가 하락”으로 나이지리아 경제는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안보 상황은 악화되었고, 거시 경제 개혁이 취소되었으며, 경제 정책은 점점 더 예측할 수 없게 되었다. 당연히 1인당 실질 소득은 2015년 이후 감소하여 2021년 말에는 1980년대 수준에 도달했다. 나이지리아 역사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의 차입 욕구가 보여주듯 그의 방만한 재정 운용(부하리는 임기 종료까지 2주가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8억 달러 규모의 세계은행 신용 한도와 관련해 나이지리아 상원에 승인을 요청했다) 나이지리아를 77조 재정 적자로 몰아 넣었다.

 

마찬가지로, 안보 상황도 부하리의 치하에서 더욱 악화되었다. 대통령 취임 당시 안보 분야는 부하리 대통령의 군부 경력을 고려해 볼 때 전임 대통령 보다 우위를 점한 분야라고 일반 대중들이 확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치하에서 안보 상황이 악화된 것은 아이러니했다. 부하리는 대선 캠페인에서 이러한 자신의 명백한 이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2015년 이후 공공 안전이 악화되는 가운데, 최소 63,000명의 나이지리아인이 다양한 국가 및 비국가적 초법적 폭력 행위로 사망했다. 특히 이슬람 반군, 무장 강도, 납치범의 공격으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사상자 숫자는 제쳐두고라도, 무엇보다 자경단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불법 의식이 만연해졌고, 그 결과 법 집행 기관과 사법 제도에 대한 일반 대중의 좌절감이 높아갔다. 

 

부패도 심화됐다. 작년에 나이지리아의 한 신문은 “부하리 정부의 핵심 요직 임명에 정실주의와 족벌주의가 판을 쳐 정부 기관의 업무에 부정부패가 만연하다”고 개탄했다. 동시에 연방 검찰총장과 법무부 장관의 “연이은 간섭”은 나이지리아의 청탁금지 기관인 경제금융범죄위원회(EFCC)의 업무를 방해한 것으로 보인다. 부패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고위 공직자들에 대한 사면은 투명성의 상징인 부하리의 이미지를 더럽혔고, 투명성에 대한 그의 약속은 단지 수사에 불과하다는 일반 국민들의 인식을 강화시켰다. 역설적으로, 부하리가 한때 미국 고위 외교관에게 털어놓은 것처럼 “나이지리아의 부패 유산이 식민주의의 유산보다 훨씬 오래 지속될 것”이라는 그의 개인적 두려움을 그의 정부가 잘 증명해 주고 있다.

 

부하리가 실패했다고 말하는 것은 나이지리아의 모든 실패에 대해 그에게 개인적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다. 그는 궁극적으로 나이지리아의 지배적인 정치 문화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여러 면에서 단순히 그의 손으로 일을 처리했을 뿐이다. 어떤 나이지리아 지도자도, 심지어 부하리보다 지적으로 우수하고 행정적인 기민함을 가진 지도자도 나이지리아의 사회경제적 문제(얽힘과 복잡함 때문에)를 떠맡아 해결할 것으로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솔직한 나이지리아의 현실이다. 특히 짧은 8년의 재임 기간 내에서는 더욱 그렇다. 나이지리아와 같이 석유와 같은 것에 올인한 ‘단일 문화 경제’는 익숙한 관행으로 부터 그렇게 쉽게 빠져 나올 수 없으며, 변화무쌍한 세계 석유 시장의 움직임을 전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한 매일 일어나는 437,000 배럴의 원유 도난 사건들과 국가 전력망의 연쇄 붕괴 (공식 집계상 부하리 대통령 재임 기간 99회 발생)도 전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하리는 의심할 여지 없이 대통령인 자신에게 주어진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고, 실질적인 사회 변혁을 위해 취임 직후 그에게 호의적이었던 사회 분위기를 그가 잘 활용하지 못한 것을 죽는 날까지 후회할 것이다.

 

대체로, 부하리는 통치할 자금과 수단이 아마 부족했기 때문에 실패했을 것이다. 우선, 그는 일관된 경제 비전과 같은 것을 단 한 번도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그의 정적들에 따르면, 그는 한때 권력에서 쫓겨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문제와 해결책에 대한 절대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자만하였고 “그의 편의대로 정부 기구를 도구로 사용하려” 행동하였다. 그는 대통령으로서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인재들의 풍부한 기술 및 경제적 전문성을 이용할 필요성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그는 항상 1970년대식 명령 및 통제적 사고 방식에 갇혀 현재의 긴급하고 어려운 상황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대통령직에 오르면서 그는 자신이 정말로 원했던 유일한 것, 말하자면 2번째 쿠데타를 성취했을 수도 있다. 즉, 1980년대 초중반 군사 정권의 수장으로서 처음 권력 심장부로 왔지만 권력에서 부당하게 축출되었다고 느꼈을 것을 (원문 그대로) 되찾는 것 말이다. 이 가설이 맞다면 부하리가 2015년 다시 권력을 잡은 것은 공적 구원보다는 개인의 명예 회복과 더 깊은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부하리는 또한 나이지리아 일반대중과 교감하지 못해 실패했다. 그의 전임자인 조나단 대통령은 항상 기쁘게 해주려고 너무 간절한 것처럼 보였지만(그는 발을 딛고 있는 시간만큼 많은 시간을 무릎을 꿇은 채 보냈다), 부하리의 냉담함은 그를 무감각의 대가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비난에 노출될 정도였다. Katsina 주(洲) Daura에 있는 자신의 시골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그의 이례적인 인정은 진정한 겸손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그가 충분한 지식이나 경험이 없고 그래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시간을 마냥 흘러 보내는 것이라는 세간의 믿음을 강화시키는 것 뿐이었다. 자신의 정치적 기계와 도구를 구축하지 않고 그의 후임 대통령인 볼라 티누부(Bola Tinubu)의 지원을 받아 권력을 장악한 부하리는 항상 국가 지도자라기 보다는 분파 지도자에 가까웠다. 그런 점에서 그가 나이지리아의 기독교 공동체와 이슬람 공동체 사이의 민족종교적 분열을 심화시켰다고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의 분노를 충분히 받아 마땅하다. 나이지리아의 정치적 리더십의 역사에서 그토록 국제적이었던 사람(부하리)이 동시에 그렇게 편협한 사람으로 보였던 적이 없었다.

 

나이지리아인들이 부하리 대통령으로부터 교훈으로 얻어야 할 중요한 통찰력이 있다면, 많은 사람들로 부터 개인적으로는 청렴하다고 인정받는 한 개인이 부패와 무능으로 정의되는 그의 정부를 이끌어나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반대로, 현재 나이지리아 대통령인 볼라 티누부 정부가 들어서면서 나이지리아인들은 부패한 것으로 널리 알려진 한 지도자가 비교적 불법 행위가 없고 합리적이고 유능한 정부를 잘 이끌어나갈 수 있는 지 그 여부를 곧 알게 될 것이다.

First published in :

C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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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enezer Obadare

Ebenezer Obadare 는 미국 싱크탱크 CFR (Council on Foreign Relations)의 아프리카 분야 연구위원이다. 그는 뉴욕대 Global Affairs 센터 연구위원이기도 하다. CFR 로 오기 전 그는 미국 캔자스대 사회학 교수였다. 그는 11개 저서의 저자 또는 에디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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