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bscribe to our weekly newsletters for free

Subscribe to an email

If you want to subscribe to World & New World Newsletter, please enter
your e-mail

Diplomacy

이라크 쿠르드족과 쿠르드-이스라엘 관계 활용 실패

쿠르드 국기를 들고 있는 소년

Image Source : Felix Friebe / Shutterstock

by Farhang Faraydoon Namdar

First Published in: Dec.11,2023

Dec.29, 2023

바슈르와 이스라엘의 역사

주로 바슈리족인 쿠르드족과 이스라엘인은 자연스러운 동맹을 맺을 수 있는 주목할만한 유사점을 공유한다. 1991년 남부 이라크에서 바슈르가 하나의 정치 체제로 출범한 이후, 바슈르는 자신의 정치 체제를 약화시키고 말살하려는 적대적인 이웃과 씨름해 왔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아랍 국가들에 둘러싸인 이스라엘의 도전과 유사하다. 더욱이 쿠르드족과 이스라엘인은 정치적, 문화적, 역사적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적대적인 이웃이 둘러싸고 있는 지역 현실을 고려할 때 쿠르드족과 이스라엘 관계는 불안정한 성격을 가지고 있고 이로 인해 쿠르드족-이스라엘 관계에 대한 기존 문헌은 아주 드물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문헌이 중요한 질문, 즉 바슈르 정치가 쿠르드족-이스라엘 관계를 어떻게 형성해 왔는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잃어버린 이스라엘 부족과 쿠르드족

쿠르드족의 기원에 대해선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그들을 다른 민족과 연관시키는 다양한 이론이 있다(Limbert 1968, 40-1). 그러나 이스라엘의 유대인과 바슈르의 쿠르드족 사이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인 연구가 거의 없었다. 기원전 7세기 고대 이스라엘에 거주하던 이스라엘 10지파 중 8지파가 딴 곳으로 이주하여 사라진 것으로 나타났다. 멕시코에서 일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국가가 이들 이스라엘 지파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Lyman 1998, 7). 2001년 바슈리족의 기원에 관한 DNA 연구 프로젝트가 발표되어 “쿠르드족 유대인과 세파르디 유대인은 서로 구별할 수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Nebel et al. 2001, 1095), 이러한 사실은 쿠르드 민족주의와 이슬람주의 정서 때문에 쿠르드족 사이에서 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더욱이, Hennerbichler는 쿠르드족이 중동에서 가장 오래된 국가 중 하나를 형성했다고 주장하며 모달 쿠르드족 일배체형 DNA와 아슈케나즈 유대인의 DNA 사이의 놀라운 유사성을 강조한다(2012, 69-70). 또한, Mcdowell은 이란화된 쿠르드인 중 다수가 셈족 출신이라고 주장한다(1992, 9). 이러한 관점과 주장에도 불구하고, 쿠르드족은 자신들을 오랜 기간 동안 이 지역에 거주해 온 별개의 독립적 집단으로 간주한다. Hemeres는 쿠르드족이 중동에서 가장 오래된 민족 중 하나이고 알파벳을 보유하고 있으며 현재 존재하고 있는 많은 중동 국가보다 앞서 존립했다고 주장한다(2022년). 그러나  Hemeres가 수백 년 전 학자들의 관찰과 고대 자료에 의존하는 것은 과학적으로 좀 더 신뢰할 만할 자료에 의해 보완될 필요가 있다. 쿠르드족의 기원을 이해하려면 좀 더 학문적이고 과학적인 접근 방식이 바람직할 것이다.

 

이슬람의 반발을 두려워하여 이스라엘인과 쿠르드족 모두 공통된 유대 관계를 인정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바슈리족의 상당 수가 무슬림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스라엘 정책 입안자들은 바슈리족이 민족 종교 집단으로서 유대인과 유사하다고 간주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유대인은 유대교를 따르며 인종적으로는 유대인이기 때문이다(Greenspoon 2014, 129). 이러한 점에도 불구하고 문헌에서는 이라크와 이스라엘이 국경을 공유하지 않고 이슬람 반발의 위험이 이스라엘인과 쿠르드족 간 유대 관계로 인한 잠재적 이익보다 크기 때문에 이스라엘인과 쿠르드족 간 공유된 특성이 제한적인 역할을 했다고 시사한다.

 

기존 문헌에는 이스라엘이 친족 관계 때문에 쿠르드족을 지원했다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전략적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쿠르드족을 지원했다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바슈리족은 이스라엘의 셈법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다. 이스라엘인과 바슈리인 모두 그러한 연관성을 인정하더라도 이라크와 이스라엘 사이에 현재 진행 중인 전쟁 상태로 인해 그러한 연관성을 부인할 수도 있다(Romano and Rojhelat 2019, 171). 최근 2022년에 이라크 의회는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범죄로 규정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와 관련해 유죄 판결을 받으면 사형에 처해질 수 있다(AP 2022). 자신의 역사의 대부분을 통틀어 바슈리족은 이스라엘인과 동일시하지 않았고 대체적으로 팔레스타인인에 대해 더 많은 동정심을 보였다. 오늘날 쿠르드족 지역에서 친이스라엘 정서가 나타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입장 변화와 쿠르드 지역에 대한 이스라엘의 개입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성을 확립하는 것은 어렵다. 2005년 이후 쿠르드족 지역의 서구화 증가와 교육 접근성 향상도 이러한 변화에 기여했을 수 있다. 더욱이 바슈르-이스라엘 관계는 쿠르드 자치 정부(KRG)의 관할권에 속하기보다는 주로 이라크 쿠르드족의 특정 세력과 관련되어 왔다. 이것은 쿠르드 지역 내의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어느 정도 사회적 분열 때문이다.

바슈르

이라크에 실존하는 약한 국가의 존재와 이라크의 이웃 국가들과의 역사적 분쟁으로 인해 바슈리족은 조직화 및 외부 세계에 대한 접근 측면에서 중동의 다른 쿠르드족에 비해 독특한 이점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바슈리족은 법적으로 소수 민족으로 인정된 유일한 사람들이었고(Edmonds 1959), 특히 바르자니족은 1920년대 이라크 정부에 대항한 쿠르드족 혁명의 지도자로서 국제적인 인정을 받았다. 1946년에 마하바드 쿠르드 공화국이 세워졌었으나 결국 해체되었다(Edmonds 1959, 2). 무스타파 바르자니(Mustafa Barzani)는 이 쿠르드 공화국을 구하려는 시도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으며, 소련 영토로 가서 피난처를 찾기 이전에 이란 군대와의 장기간의 전투에서 추종자들을 이끌었다(Reisinzadeh 2019, 65). 마하바드 쿠르드 공화국이 붕괴된 후, 1946년 이라크 군대의 쿠르드족 장교 4명이 말라 무스타파를 초대하여 쿠르드 민주당(KDP)을 창설하고 말라 무스타파를 지도자로 내세웠다(Hevian, Rodi 2013, 97). 1958년 이라크 7월 혁명 이후 바르자니와 다른 쿠르드족 민병대는 이라크로 돌아가는 것이 허용되었고, 이라크는 여단장 Abd al-Karim Qasim 하에서 권력을 중앙집권화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이들 쿠르드족을 환영했다(Rubin 2007, 354). 이라크와 쿠르드족 관계는 개선되었고, 이라크는 쿠르드족과 아랍인 간의 통합을 선언했다(Bagley 1959, 288-9). 바르자니는 신속하게 쿠르드족의 대부분에 대한 통제권을 주장하여 이라크 정부에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Lortz 2013, 39).

 

이라크가 인정한 쿠르드 민주당과 바르자니의 강점은 사람들을 집결시키고 쿠르드족에 대한 통제를 유지하는 능력에서 분명했다. 그러나 쿠르드 민주당이 자치권을 추구한 반면 이라크는 이집트 나세르의 범아랍주의에 맞서 국가를 중앙집권화하려 함에 따라 쿠르드족-이라크 정부 간 이해관계가 충돌하게 되었다. 1961년 바르자니가 이끄는 쿠르드족이 이라크 정부에 반란을 일으켜 제1차 쿠르드-이라크 전쟁이 일어났다(Rubin 2007, 353-5). 쿠르드족의 반란은 이라크 군대 내 쿠르드족 병사들의 상당한 탈퇴로 힘을 얻었다(Pollack 2004, 219-20). 쿠르드족 혁명은 성공하여 1961년에 많은 도시를 통제하고 이라크 군대와 교전을 수행했다(Paul 2013, 214-5). 이러한 혁명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보수, 마르크스주의, 민족주의 세력으로 구성된 쿠르드 민주당 내 분열로 바르자니 체제에 대한 도전이 발생했다. 당내 주요 세력은 Malayyis(바르자니 지지자)와 Jalalyis(Talabani 추종자)였는데 당내 분열로 쿠르드족 통합과 권리 추구가 힘들어졌다(Abbas 2020). 이스라엘인들이 이라크 바슈르에 도착했을 때 쿠르드족은 이미 분열되어 있었다.

이스라엘-쿠르드족 상호 비난

위에서 설명한 쿠르드족의 역사적 발전은 쿠르드족을 지원하려는 이스라엘의 성향을 설명한다. 그러나 쿠르드족이 이란과 이스라엘 모두를 성공적으로 설득하여 그들을 돕도록 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란의 경우, 이라크에서 쏟아져 나오는 강력한 쿠르드족 혁명에 대한 두려움이 이스라엘의 이익에 동조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스라엘은 이란 및 터키와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이들 국가 내 쿠르드족에 대한 모든 지원을 외국의 개입으로 간주하면서도 중요한 시기에 쿠르드족을 전략적으로 지원했다.

 

이스라엘의 지원을 확보하려는 쿠르드족의 노력은 이스라엘이 도움을 주기로 동의하기 이전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Ismet Sharif Vanly에 따르면 이스라엘을 방문한 최초의 바슈리인은 무스타파 바르자니 또는 그의 동료가 아니라 쿠르드 민주당 사무총장인 Ibrahim Ahmad(Bengio 2017)였는데 Ibrahim Ahmad는 당시 쿠르드 민주당 정치국을 통제함으로써 무스타파 바르자니와 세력 균형을 이루었다. 사실상 당의 의장을 맡고 있는 Ahmad는 바르자니가 부재하는 동안 이스라엘을 방문하는 등 이스라엘에 접근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Ahmad가 쿠르드 민주당에서 리더십을 발휘하고 1955년 당명을 Kurdish 민주당에서 Kurdistan 민주당으로 바꾼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영향력은 상당했다(Reisenzadeh 2019, 65).

 

당내 분열을 우려한 바르자니는 1959년에 Kamuran Ali Baderkhan을 이스라엘로 보내 외교부 장관 Golda Meir를 만나 정치적 지원을 구했다(Alvand 2016, P: 71). 그러나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지원은 즉시 이루어지지 않았다. 터키 및 이란과의 관계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이스라엘은 쿠르드족을 지원하기 전에 이들 국가의 동의가 필요했다. 이스라엘의 쿠르드족 지원은 혁명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이라크 바그다드를 점령하기 위한 전술적 조치였는데 이것은 이란과 터키가 가장 우려했던 부분이었다(Alvandi 2016, 72). 쿠르드족에 대한 이스라엘 지원이 그 성격상 전술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외교적, 재정적, 군사적 측면을 포괄하는 다면적인 접근 방식이었고 그런 만큼 상당히 독특했다. 이 기간 동안 쿠르드족의 끈기와 이란, 이스라엘, 미국 간의 전략적 이해관계 일치는 이스라엘-쿠르드 관계를 형성한 복잡한 역학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중동의 비(非)정부 행위자를 지원하는 데는 일반적으로 무기 및 재정 지원이 포함된다. 예를 들어, 이란은 처음 중동 지역 전역에 있는 시아파 단체를 지원했는데 주로 정치적인 지원이었다. 이란이 시아파 단체에 군사 훈련을 제공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와 1980년대부터 였다(Reisinezhad 2019, 61-70). 그러나 쿠르드족에 대한 이스라엘의 지원은 한 국가가 비(非)국가 행위자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조직력과 적응성을 강화한 중동 역사상 독특한 사례이다. 쿠르드족에 대한 이스라엘의 지원은 무기와 현금 지원 그 이상이었다. 처음에는 이스라엘 정보기관인 모사드와 이란 정보국 Savak이 협력하여 1966년에 쿠르드 민주당 방어국(Parastin)을 설립했는데, 이것은 이전의 관행에서 벗어난 행동으로 이라크 군에 대한 군사 정보 수집을 목표로 했다(Ghareeb 1981: 133, Hennerbichler 2012, 254). 배신을 포함한 당내 분열 문제가 역사적으로 쿠르드족 혁명을 방해했기 때문에 이것은 쿠르드족에게 중요한 변화였다. 또한 이스라엘은 몇 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쿠르드족과 미국 간의 만남을 촉진시킴으로써 외교적 지원을 제공했다(Alvandi 2016, 74). 더욱이 이스라엘은 쿠르드족에 대한 상당한 재정 지원을 확대했으며, 1965년부터 1975년까지는 이스라엘의 군사 고문들이 쿠르드 민주당 본부에 주둔했다(Mamikonian 2005, 395). 이스라엘의 이러한 광범위한 지원은 쿠르드족을 본능에 의존하는 전통적으로 조직된 무장 부족에서 정보 기능을 갖추고 현대 전쟁 기술을 사용하는 보다 잘 조직된 집단으로 변화시키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쿠르드족은 일반적으로 훈련보다는 지원을 더 원하고 요청했다. 바르자니 세력의 대표인 Bedir Khan이 1963년 이스라엘을 방문했을 때 그는 Golda Meir를 포함한 이스라엘 최고 지도자들과 만나 돈, 무기, 무선 송신기 확보에 전력을 기울였다(Alvandi 2016, 72). 이스라엘이 제공한 지원은 이란이 레바논의 헤즈볼라, 이라크의 Popular Mobilization, 예멘의 후티 반군과 같은 단체와 거래할 때 유사한 접근 방식을 채택하도록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의 전투 참여는 이스라엘 사령관 Tsuri Sagay가 전쟁 계획 및 감독을 통해 쿠르드족을 지원하여 이라크군에 상당한 사상자를 낸 전투에서 잘 드러났다. 1965년 이라크군과의 전투에서 쿠르드족이 성공하자 이라크는 쿠르드족에게 자치권을 부여하기로 합의했는데 이것은 결국 쿠르드족 내 쿠데타로 이어졌다. 이라크군은 1969년 1월까지 쿠르드족에 대한 또 다른 공격을 자제했다(Alvandi 2016, P:70). 1975년의 좌절에도 불구하고 쿠르드족 지도자들은 그대로 자리를 지켰고 쿠르드 민주당은 정치 세력으로 계속 남아 있었다. 이러한 쿠르드족의 회복력에 기여한 주요 요인 중 하나는 이스라엘이 쿠르드족의 재건을 지원한 방식이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쿠르드족 지원은 이스라엘의 외부 균형 전략의 틀에 맞춰 진행된 비국가 행위자에 대한 국가 행위자의 지원으로 볼 수 있다.

주변부 독트린

벤 구리온 초대 총리와 같은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고안한 주변부 독트린은 이스라엘에 적대적인 아랍 지역 국가들이 제기한 도전에 대한 이스라엘의 대응책으로 등장했다. 주변부 독트린은 쿠르드족과 아랍 기독교인을 포함한 비(非)아랍 국가 및 정치 단체와의 관계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Romano and Rojhelat 2019, 165-6; Samaan 2019, 384; Kaye and Roshan 2011, 22). 중동 지역에 쿠르드족 인구가 상당히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쿠르드족 관계는 주변부 독트린에서 가장 약한 고리였다. 이스라엘은 주로 이란 및 터키와 같은 국가 행위자들과 협력하여 이들 국가의 쿠르드족 운동에 대한 지원을 제한했고 반면 이스라엘에 대한 이라크의 적대감을 고려하여 바슈리족 지원에 초점을 맞추었다(Romano and Rojhelat 2019, 172). 이스라엘과 쿠르드족 간 독특한 관계는 주로 이라크를 약화시키기 위한 전략하에 고안되었다. 왜냐하면 이라크가 특히 이란의 영향권 아래로 온 이후 이스라엘과 전쟁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쿠르드 관계에는 쿠르드 자치정부(KRG)의 틀 내에서 이루어지는 비즈니스가 포함되지만(Romano and Rojhelat 2019, 76-7), 아직 다른 쿠르드족 그룹으로 실질적으로 확장되지는 못했다. 이스라엘과 쿠르드 관계의 관점에서 볼 때, 주변부 독트린은 쿠르드족이 군사적 패배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고 이라크에 대항하는 이라크 내 하나의 정치적 세력으로 남는 데 기여했다는 점에서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방어국의 설치와 쿠르드 민병대의 훈련은 쿠르드 민주당(KDP)을 굳건히 하고 내부 분열을 막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르드지역에 두 개의 작은 국가가 사실상 존재하게 만든 쿠르드족 내 초기의 분열이 바슈르에 대한 이스라엘의 개입보다 먼저 일어났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쿠르드족 내 초기 분열은 계속해서 상당한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이 제공하는 지원을 활용하는 바슈리족의 능력을 제한하고 있다.

장애물로서의 쿠르드족 분열

이라크 정부에 승리를 거둔 이후 쿠르드족 내부 분열이 뚜렷해졌다. 쿠르드 민주당의 정치국, 특히 Jalalyis 세력은 이라크와의 협상을 선택했고 심지어 1966년 이라크 바트당 정부에도 참여했다. 무스타파 바르자니와 이스라엘의 지원을 받아 탄생한 바트당 정부에는 1960년대 후반까지 쿠르드 민주당원이 참여했다(Rashid 2017, 49- 52). 이러한 참여는 광범위했고 결국 쿠르드 민주당은 분열되었다. 잘랄 탈라바니(Jalal Talabani)가 이끄는 정치국 세력이 그 존재감을 뚜렷이 드러내면서 망아지를 의미하는 자쉬(Jash)라는 용어가 인기를 얻었는데 이것은 쿠르드족 공동체 내의 반역자를 의미했다. 이러한 내부 분쟁으로 쿠르드족은 분열되었고 그 결과 이스라엘, 이란, 미국의 지원을 완전히 활용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쿠르드 지역에 두 개의 상충되는 대리인 세력이 만들어졌다. 한 세력은 서방과 손을 잡았고 다른 하나는 동부 블록과 연대했다. 이로 인해 바슈르 지역에서 쿠르드족 내 갈등이 악화되었고, 외부 세력은 쿠르드족의 국가 수립이라는 열망을 실현하는 데 도움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쉽게 조종할 수 있게 되었다.

 

바르자니는 이란 그리고 이란을 통해 이스라엘과 미국의 물류, 금융, 군사 지원에 크게 의존했다. 1975년 이라크와 이란이 적대 행위를 종식하기로 합의했을 때 쿠르드 혁명은 임박한 붕괴에 직면했다(Mcdowal 1992, 21-23). 결국 바르자니는 모든 쿠르드 전사에게 집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여 이라크 정부에 대한 쿠르드족의 추가 저항을 막았다. 그러나 바르자니의 오른팔로 불리운 Mahmoud Othman은 인터뷰에서 혁명이 무너진 것은 지도력의 실패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우리는 무기, 돈, 영토 등 모든 것을 갖고 있었지만 이라크는 그렇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란의 국왕은 우리가 계속 싸울 수 있다고 말했다.(The Best Video News 2023) 자원과 잠재적 지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르자니는 일방적으로 전투를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1975년 이후 쿠르드 민주당은 바슈르에서 이라크와 이란의 경찰로 변신해 이라크에 맞서 싸우는 어떤 무장단체의 출현도 막았다. 이러한 쿠르드족의 행동을 방지하기 위해 이스라엘이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은 제한적이었는데, 이미 쿠르드족 분열이 발생했다. 바르자니가 대내외 관계를 독점하며 일방적으로 이라크와의 전투를 중단했다. 예를 들어, 1978년에는 약 1700명의 쿠르드 애국연맹 민병대가 시리아 국경을 따라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이란-이라크-터키 삼각지대로 이동을 시도했으며 그곳에서 무기와 탄약을 받았다. 이로 인해 쿠르드 민주당 세력과의 충돌이 발생하여 많은 쿠르드 애국연맹 민병대원이 사망하고 포로가 되었다(Rizgar 2021, Pencemor 00:26:00-00:29:00).

 

쿠르드 애국연맹(PUK)은 1976년 창설된 이래 소련과 시리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쿠르드 애국연맹의 창립자인 잘랄 탈라바니에 따르면, 소련은 무스타파 바르자니가 쿠르드 혁명 종식을 선언한 1975년에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소련은 탈라바니에게 동독에서 만남을 요청했고 그 곳에서 탈라바니는 러시아 요원을 만났다. 탈라바니는 자서전에서 러시아 요원이 “알렉산더를 아느냐”고 물었다고 회상한다. 이에 탈라바니는 “예, 나는 그를 아주 잘 압니다”라고 대답했다. 둘 다 웃기 시작했다(Rashid 2016, 20-31).

 

쿠르드 애국연맹은 7명의 멤버가 1976년 시리아 다마스쿠스에서 창립했다고 주장하는 쿠르드 애국연맹의 공식 역사와는 달리 소련에서 그 창립이 결정되었다. 공동 창립자인 Omar Sheikhmous는 잘랄 탈라바니가 이미 1976년 5월 22일에 쿠르드 애국연맹을 결성했다고 말한다. 쿠르드 애국연맹 창설은 시리아 국영 라디오에서 발표되었다. 다른 멤버 등은 나중에 통보를 받았다 (Pencemor 2017, 00:10:40 – 00:12:00). 탈라바니는 “하페즈 알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을 만났고 그는 우리를 돕겠다고 약속하며 시리아는 당신의 조국이라고 말했다”고 덧붙였다(Rashid 2017, 38). 쿠르드 애국연맹 자금의 대부분은 리비아로 부터 나왔는데 그 규모가 수백만 달러에 달했다(Pencemor 2017, 00:40:00 – 00:41:00). 흥미롭게도, 1960년대 이스라엘이 취한 전략적 움직임은 이제 이라크에서 비슷한 이해관계를 공유하고 있는 적수 시리아의 손에 넘어갔다. 오늘날 쿠르드 지역은 정치적, 경제적으로 그리고 조금 덜한 정도 사회적으로 쿠르드 민주당과 쿠르드 애국연맹 사이에서 분열된 상태로 남아 있다.

 

쿠르드 자치 정부(KRG)는 사실상 내부적으로는 주권을 누리고 있지만 술라이마니야와 할라브자 지역의 안보와 경제를 통제하는 쿠르드 애국연맹과 아르빌과 다호크 지역의 안보와 경제를 감독하는 쿠르드 민주당 사이의 연합체로 운영되고 있다 (Namdar 2021; Greaves 2019).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은 주로 쿠르드 민주당과 관계를 맺고 있다. 전통적으로 이란과 동맹을 맺어온 쿠르드 애국연맹은 이스라엘과의 관계 수립을 자제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르드 자치 정부의 절반을 통제하는 쿠르드 애국연맹은 이스라엘의 쿠르드 자치 정부내 주둔에 암묵적으로 동의했으며, 이스라엘의 지원과 쿠르드 지역으로의 물자 운송을 허용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은 지난 20년 동안 쿠르드 민병대를 훈련시키고 이 지역에 군 장비를 파견했다(Romano and Rojhelat 2019, P:175). 이러한 이스라엘의 관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과의 주요 외교 관계는 쿠르드 민주당에 의해 이루어진다.

오늘날 쿠르드-이스라엘 관계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이스라엘이 바슈르에 대한 접근권을 잃었을 때, 이스라엘을 위한 가장 유력한 복귀 기회는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 축출 이후였다. 바슈르에 이스라엘 정보기관이 주둔했다는 보고는 2003년 이후에 나왔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이 시리아, 이란, 이라크를 감시하는 데 관심이 있음을 나타낸다(Hersh 2004). 2022년 이란은 아르빌의 한 저택에 이스라엘 스파이 집단이 거주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이 저택을 자신들이 폭파시켰다고 주장했다(Yahya and Abdul-Zahra 2022). 이러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이란이 이 지역에 더욱 입지를 강화함에 따라 쿠르드족은 미국 이스라엘 공공문제위원회(AIPAC)의 친쿠르드족 유대인 로비를 통해 미국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이스라엘과 관계를 유지하는 데 잠재적인 이익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Bengio 2014, P: 3). 이스라엘은 쿠르드 지역의 독립을 위한 국민투표를 공개적으로 지지했지만, 이러한 지지는 공개적으로는 중요했지만 현장의 지지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다. 이러한 국민투표는 이라크로부터 큰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이 지역을 붕괴 직전으로 몰아넣었으며 결국 이란이 주도하는 중동 지역 시아파 간 반(反)쿠르드 동맹 형성을 정당화시켰다(Bengio 2017).

 

게다가, 바슈르는 쿠르드족 국가를 실존적 위협으로 인식하는 아랍 국가들에 둘러싸인 채 바다를 갖지 못해 독립 국가로서 스스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조건이 부족하다. 결과적으로 이라크 내에서 헌법으로 보장된 자치권은 쿠르드족의 권리를 더욱 잘 보호하고 이스라엘에게 더 우호적인 동맹이 될 수 있다. 바르자니에 대한 이스라엘의 지원은 1960년대 바르자니 그리고 지금은 중앙집권적인 군사력을 갖고 있는 Kurdish 민주당에게 향하는 것보다 Kurdistan 민주당으로 향한다면 더 유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소설가 Ibrahim Ahmad와 쿠르드 애국 연합은 바르자니와 이스라엘의 관계를 폭로했는데, 바르자니가 쿠르드 민주당의 지도자였기 때문에 쿠르드 민주당을 이에 연루시키지는 않았다(Bengio 2014). 결과적으로 이스라엘과 바슈르 세력 사이의 관계는 충분히 발전하지는 못했다.

 

더욱이, 현재의 이스라엘-쿠르드 관계는 이스라엘-쿠르드 민주당 간 관계로 더욱 정확하게 특징지어질 수 있다. 왜냐하면 특히 쿠르드 민주당이 쿠르드 자치 정부 내에서 보다 중요한 직책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쿠르드 민주당은 이스라엘의 지원을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강화했고 쿠르드 자치 정부는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쿠르드 민주당의 보안 기관은 더욱 탄압적으로 변했고, 쿠르드 민주당이 통제하는 지역은 언론인과 활동가를 탄압해 국제사회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다(Human Rights Watch 2021). 쿠르드 민주당-쿠르드 애국연맹 간 관계에 대한 이러한 긴장은 쿠르드 지역을 더욱 약화시켜 이스라엘의 주변 독트린의 목표를 갉아 먹었다. 더욱이 쿠르드 민주당은 독립된 쿠르드 국가를 옹호하고 있는데 이 지역이 육지로 둘러싸여 있어 실질적으로 그 실현 가능성이 더 클 수 있다. 생존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 실시된 이라크로부터 독립해서 자신의 석유를 수출하려는 쿠르드 민주당의 시도에 대한 이스라엘의 지원은 결국 실패하여 쿠르드 지역을 더욱 취약하게 만들었다(Henderson et al. 2023). 이제 경제가 약화되고 이민으로 인해 인구가 감소하면서 쿠르드 지역은 더욱 분열되었다(Namdar 2021).

 

쿠르드-이스라엘 관계는 쿠르드 민주당이 독점하게 되면서 양측 모두에게 위험이 증가했다. 쿠르드 애국동맹이 이스라엘과 적극적으로 관계 수립을 모색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쿠르드 애국연맹은 쿠르드 자치정부(KRG) 내에서 일부 문제만을 담당하고 있을 뿐이었다. 2008년 쿠르드 애국연맹 사무총장이자 이라크 대통령인 잘랄 탈라바니가 에후드 바락 이스라엘 총리를 잠깐 만났을 때 그는 비판에 직면했다. 그는 바락 이스라엘 총리와의 회담에서 자신은 이라크 대통령이 아닌 쿠르드 애국연맹 사무총장의 자격으로 바락 총리와 만났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Aljazeera 2008). 게다가 이스라엘과 미국이 쿠르드 애국연맹과 거리를 두면서 쿠르드 애국연맹은 이라크와 이란에 더 가까워졌다. 이러한 관계 변화는 쿠르드 자치 정부를 약화시켰고 이 지역에서 이스라엘의 존재감을 감소시켜 불확실성을 증가시킬 수 있다.

 

쿠르드 자치 정부, 특히 쿠르드 민주당은 미국 이스라엘 공공문제위원회가 미국이 다른 방법으로는 고려하지 않았을 정책을 채택하도록 설득할 수 있다고 믿으며 미국 이스라엘 공공문제위원회에 상당한 기대를 걸었다. 이스라엘 로비스트의 영향력이 크긴 하지만, 미국이 이스라엘에 제공하는 지원은 단지 이스라엘 로비스트가 워싱턴을 설득했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스라엘의 영향력은 이스라엘이 중동 지역에서 미국에 없어서는 안될 동맹국이라는 인식에서 비롯된다(Bar-Siman-Tov 1998). 이스라엘은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고 첨단 군사 및 기술 역량 개발에 크게 기여하는 중동 지역에서 미국의 주요 동맹국으로 남아 있다. 반면 쿠르드 자치 정부는 변변한 군사력도 없이 깊게 분열된 정치 체제로 남아 있다. 많은 파벌과 정당으로 분열되어 있고 소속된 많은 민병대는 기본 훈련이 부족한 실정이다.

 

세속적 모델이 흔들리고 있고 쿠르드 자치 정부가 약화되었다는 추가적인 의미는 바슈리족 사이에서 종교적 성향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변화는 이라크로 부터의 심각한 금융 제재 속에서 발생하고 있는데, 종교 담론은 이 지역의 소셜 미디어와 언론 매체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쿠르드 자치 정부의 이러한 실패는 부분적으로 쿠르드 민주당-쿠르드 애국연맹 분열로 인해 발생한다. 쿠르드 민주당-쿠르드 애국연맹은 아직 쿠르드 지역의 예산 지분을 확보하기 위한 대(對)이라크 공동 전선을 형성하지 못했고 그 결과 지난 8년 동안 바슈리족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다. 이스라엘과의 유대 관계를 폭로하는 것은 특히 쿠르드족 사이에 고조되는 종교적 감정을 고려할 때 이미 약화된 쿠르드 자치 정부의 정당성을 더욱 손상시킬 수 있다.

결론

쿠르드족은 세계적으로 가장 중요한 국가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정치적, 사회적 권리를 쟁취해야 하는 도전에 직면해 있다. 중동에는 쿠르드 애국연맹(PUK), 쿠르드 민주당(KDP), 로자바(Rojava) 등 3개의 쿠르드 정당이 있다. 이들 정당들은 상당한 내부 주권을 획득했지만, 이들의 분열로 인해 쿠르드족의 자치에 대한 도전과 새로운 위협이 발생했다. 쿠르드족은 그들의 주요 동맹국인 미국이 이 지역 문제에서 손을 떼고 이탈하여 이웃 아랍 국가의 이익에 취약한 상태에 놓이게 되면서 자신들이 불안한 위치에 있음을 깨닫고 있다.

 

이스라엘은 쿠르드족과의 역사적, 문화적, 정치적 유사성을 인식하고 그들과 전략적 관계를 구축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나 이 지역의 지정학적 복잡성과 쿠르드족 내부 분열로 인해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활용하여 정치적 생존을 보장받을 수 있는 쿠르드족 능력이 제한되었다. 쿠르드족이 지역 현실에 적응하고 재조직하도록 돕는 이스라엘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쿠르드족은 아직 이러한 기회를 완전히 활용하지 못했다. 바슈리 정치는 그들의 이스라엘과의 관계 때문에 이 지역의 아랍 강대국들이 쿠르드족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정당성을 제공했다.

First published in :

E-International Relations

바로가기
저자이미지

Farhang Faraydoon Namdar

파항 파레이둔 남다르는 중동 지역을 취재하는 연구원이자 저널리스트입니다. 그의 글은 E-International Relations, The National Interest, Middle East Monitor 등 다양한 매체에 게재되었습니다. 그의 작품은 1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습니다. 현재 미주리 주립대학교 정치학 및 철학과의 조교로 재직 중입니다.

Thanks for Reading the Journal

Unlock articles by signing up or logging in.

Become a member for unrestricted re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