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ense & Security
이스라엘의 침공을 두려워하는 레바논 시민들이 남쪽으로 피난을 가고 있다. 1982년을 회상해 보면 레바논 시민들이 걱정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Image Source : Shutter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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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Published in: Sep.18,2024
Sep.30, 2024
긴장 고조와 더불어 지금까지 수백명을 사망케한 이스라엘의 폭격이 두려워 수천명의 레바논 시민들이 남쪽으로 피난을 가고 있다.
많은 목격자들이 공감하는 이들의 두려움은 이스라엘이 공중 폭격에 이어 더 참담한 결과를 가져올 무엇인가를 실행할 것이라는 점이다: 즉, 레바논 남부에 대한 이스라엘 지상군의 침공.
이스라엘 정부의 시각에서 이스라엘 지상군의 레바논 남부 진입과 공격은 헤즈볼라 전투원들을 레바논 중앙에 있는 리타니강 너머로 몰아낼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일 수 있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은 자신의 전쟁 목표인 이스라엘의 북부 국경 지역을 보호하고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대피한 6만여명의 이스라엘 주민들을 집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할 수 있다.
그 동기와 상관없이 이스라엘 지상군의 레바논 남부 침공과 점령 가능성은 단순한 추측이 결코 아니며, 이를 위해 이스라엘은 수천명의 군인을 레바논 국경 근처에 전진 배치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움직임이 선례가 없는 것도 아니다
레바논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나는 이스라엘과 레바논이 이전 여기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1982년 이스라엘은 내전 중인 레바논을 침공하여 수도 베이루트를 포위했다. 그 결과는 레바논 지역 전체에 재앙이었다. 이스라엘 지상군의 레바논 남부 침공으로 수천명의 민간인이 사망하고, 이스라엘의 레바논 점령으로 이미 취약한 레바논은 계속되는 정치적, 경제적 혼란에 빠지게 되고 이런 혼란은 결국 이스라엘의 북부 지역을 위협하는 헤즈볼라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피난민과 무장 투쟁
1982년 6월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은 오늘날 헤즈볼라와 이스라엘 간 전쟁과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이스라엘 간 분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은 팔레스타인에게는 Nakba, 즉 재앙으로 이어졌다. 팔레스타인 마을과 오랜 역사적 유대를 가진 아랍인들이 살고 있던 땅에 유대인 국가 탄생으로 75만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추방되거나 도망을 가야했다.
많은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레바논으로 갔고 1964년 그 곳에서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가 탄생했다. 1970년 중반 경 무장 저항 단체가 2만명의 전투원을 모집해 훈련시켰고 이 전투원들이 레바논 영토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을 적극적으로 수행해 왔다.
1982년 경 레바논은 이미 7년째 내전을 치르고 있었는데, 당시 내전은 레바논 내 크리스천과 레바논/팔레스타인 무슬림 간 벌어졌다. 1982년 6월 6일 이스라엘 국방장관 아리엘 샤론(이후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됨)은 ‘갈릴리 평화 작전’을 개시하고 PLO 를 제거하기 위해 레바논을 침공했다.
수백대의 탱크를 앞세운 4만명 이상의 이스라엘 군(軍)은 3지점에서 레바논으로 입성했다. 육로로는 국경을 넘어 레바논 남부로, 해상으로는 시돈 해역에서, 그리고 공중에서는 이스라엘 공군이 베카 밸리와 팔레스타인 난민 캠프를 폭격했다.
2개월 동안 수도 베이루트는 물과 전기가 끊긴 채 이스라엘에 의해 포위되었다. 이스라엘 공군의 폭격과 기본 물품에 대한 접근을 박탈당한 약 19000명의 레바논, 시리아, 팔레스타인 민간인과 전투원이 사망했는데, 그 중 5500명은 서 베이루트에서 온 민간인이었다.
이에 레바논 당국은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들 국가들은 레바논에 평화를 회복하고, 레바논 군을 지원하며, PLO 전투원들을 튀니지로 대피시키기 위해 다국적 평화유지군을 구성했다.
1982년 8월 경 다국적 평화유지군은 PLO 전투원들을 성공리에 이전시키고 레바논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레바논 내 폭력 사태가 격화하면서 평화유지군은 다시 레바논으로 돌아왔다.
레바논의 대통령 당선자인 바시르 제마엘이 1982년 9월 14일 암살되자 팔랑헤 기독교 민병대가 Sabra 와 Shatila에 있는 팔레스타인 난민 캠프 두 곳에 침입하여 2천명 이상의 팔레스타인 민간인을 살해했다. 이 사건 이후 이스라엘 정부는 Kahan 조사 위원회를 구성하여 이 사건을 조사했고 이스라엘이 이 살해 사건(학살)에 간접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결론내렸다.
헤즈볼라의 탄생
이러한 역사는 모두 이 지역의 현재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과 점령, 베이루트 포위, 그리고 이후의 학살 사건은 결국 헤즈볼라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레바논 남부의 소외된 시아파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오랫 동안 범아랍 정당과 민병대를 통해 자신의 전투원들을 동원했지만 1985년 결국 헤즈볼라를 탄생하게 만든 것은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이었다. 전 이스라엘 국방장관이자 총리였던 에후드 바라크는 2006년 인터뷰에서 “헤즈볼라를 만든 것은 우리였다”고 말했다.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은 또한 레바논-서방 관계를 악화시켰다. 레바논과 팔레스타인의 많은 무슬림들은 다국적 평화유지군(특히 미국)을 실패작으로 평가하였고 심지어는 이스라엘의 공범으로 여겼다.
1982년 이후 미국인과 서구인들은 테러의 주요 대상이 되었다. 이후 10년 동안 80명 이상의 미국인과 유럽인들이 헤즈볼라의 인질이 되었고, 그 중 일부는 수개월 동안 고문을 당했고 다른 이들은 사망하기 가지 했다.
1983년 10월 23일 베이루트에 있는 미군 막사에 대한 테러 공격이 발생하여 220명의 미국 해병대, 10명의 선원, 3명의 군인을 포함한 300명 이상이 사망했다. 이 사건 발생 몆분 후 자살 테러 공격으로 58명의 프랑스 공수대원이 사망했다. 이슬람 지하드는 이번 공격기 자신의 소행이라고 밝혔다. 이들 공격을 수행한 몇 명은 1985년 12월 헤즈볼라를 공식적으로 만든 사람들로 여겨진다.
헤즈볼라 대원 모집을 지원하다
19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은 레바논 남부에서 전개되는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을 저지시키려는 침공 목표를 달성하는 데 실패했다. 오히려 침공은 많은 레바논인이 이스라엘에 반감을 품게 하고 헤즈볼라가 많은 대원들을 모집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내면서 역효과를 냈다.
이스라엘은 1982년 8월 베이루트에서 철수했지만 2000년까지 남부 레바논을 계속 점령했다. 그 기간 동안 이스라엘의 점령에 저항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많은 레바논인을 불법구금했다. 그 중 일부는 비인도적인 환경에서 기소없이 구금되었고, 다른 일부는 불법적으로 이스라엘로 이송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많은 레바논인의 눈에 헤즈볼라의 정당성은 커졌고 헤즈볼라에 대한 지지도 커졌다. 1989년 레바논 내전이 끝난 후 레바논 당국은 헤즈볼라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레바논 남부에 대한 이스라엘 점령에 저항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협정에 서명했다.
이 협정 조항은 이스라엘 점령에 대한 헤즈볼라의 무장 투쟁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2000년 이스라엘의 점령이 끝난 후, 헤즈볼라는 분쟁 지역인 셰바 농장, 골란 고원, 점령된 팔레스타인 지역이 해방될 때까지 이스라엘과 계속 싸우겠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역할을 재창조해야 했다.
2006년 헤즈볼라는 처음으로 이스라엘 영토에 진입하여 이스라엘 군인 3명을 죽이고 2명을 납치한 후, 레바논 포로를 석방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이스라엘 군은 공중, 해상, 육로로 레바논을 공격했고, 이스라엘 지상군은 레바논에 다시 진입하여 레바논 영토에서 여러 작전을 수행했다. 그 후의 전쟁에서는 그러한 포로 교환은 없었고, 약 1,100명의 레바논 민간인과 120명의 이스라엘인(대부분 군인)이 사망했다.
역사는 반복되는가?
하마스가 2023년 10월 7일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전까지 레바논과 이스라엘 간 수십 년간의 적대 행위가 전환점에 다다를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2022년 10월, 레바논과 이스라엘은 미국이 중재한 해상 국경 협정에 서명했다. 이 협정 체결은 기술적으로 전쟁 중인 두 나라 간의 관계 정상화의 시작으로 해석되었다.
하지만 가자 지구의 인도주의적 위기의 규모와 레바논에서 이어진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그러한 희망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헤즈볼라는 하마스와의 연대를 맹세했고, 이것은 지난 1년 동안 확대된 이스라엘과의 일련의 상호 보복 공격으로 이어졌다.
2024년 9월 17일 레바논 전역에서 헤즈볼라 전투원을 표적으로 삼은 부비 트랩 호출기를 이용한 이스라엘의 공격은 여러 민간인을 죽이고 일련의 사건들을 촉발시켰는 데, 지금까지 약 500명의 레바논인이 사망했고 이 공격에 대응하여 헤즈볼라는 이스라엘에 대한 미사일 공격의 지리적 범위를 확대했다. 헤즈볼라의 장거리 탄도 미사일은 250~300km(155~186마일) 거리까지 도달할 수 있는데 이 미사일은 이스라엘의 하이파와 라마트 데이비드 공군기지를 타격했다.
이러한 치명적인 대결의 다음 단계는 이스라엘의 지상 침공일 수 있다. 하지만 19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지상 침공 작전은 관련된 모든 사람에게 재앙적인 결과만 가져왔고, 레바논-이스라엘 간 수십 년간의 적대 행위를 위한 조건을 마련했을 뿐이었다. 지금 이와 유사한 공격이 이루어진다면 거의 확실히 1982년과 유사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특히 레바논 국민에게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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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reille Rebeiz는 2012년 플로리다 주립대학교에서 프랑스어권 연구로 첫 번째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2024년에 Penn State Dickinson Law에서 국제법으로 두 번째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녀는 Université de에서 국제법 및 인권 석사 학위를, 프랑스 루앙(Rouen), 레바논 세인트조셉 대학교(Saint Joseph University)에서 법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녀의 강의와 연구는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무력 충돌 상황에서 법, 젠더, 섹슈얼리티, 구술 역사, 트라우마의 교차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AAUW American Fellowship을 받은 그녀의 첫 번째 저서인 "Gendering Civil War. Francophone Women's Writing in Lebanon"은 2022년 Edinburgh University Press에 게재되었다. 이 책은 John Leonard 상 후보에 올랐다. 그녀의 두 번째 책은 1982년 이후 레바논에서 헤즈볼라의 불법 활동을 조사했는데 현재 리뷰 중이다. 저서 이외에도 그녀는 국내 및 국제 저널에 프랑스어와 영어로 여러 논문들을 게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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