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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fense & Security

가자지구 전쟁은 대량학살인가?

캐나다 토론토에서 가자 전쟁에 반대하는 팔레스타인 시위에서 대량 학살을 중지하라는 표지판을 들고 있는 사람

Image Source : Shutterstock

by Amos Goldberg , Sol Salbe (Translation)

First Published in: May.01,2024

Aug.05, 2024

그렇다. 대량학살이다. 인정하기가 너무나 어렵고 고통스럽지만,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다른 생각을 하기 위해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6개월 동안의 잔혹한 전쟁 끝에 더 이상 이 결론을 피할 수 없다. 유대인의 역사는 앞으로 이마에서 지워질 수 없는 "가장 끔찍한 범죄"로 카인(Cain)의 흉터로 얼룩질 것이다. 이와 같이, 앞으로 몇 세대에 걸쳐 역사의 판단에서 그렇게 비춰질 것이다. 

 

법률적 관점에서 볼 때, 헤이그에 있는 국제사법재판소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의 임시 판결에 비추어 볼 때, 그리고 법학자, 국제기구, 그리고 탐사보도의 언론인들에 의한 보도 유행이 증가하고 있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전향적 판결의 궤적이 상당히 분명해 보인다. 

 

1월 26일에, ICJ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대량학살을 자행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압도적인 (14-2) 판결을 내렸다. 3월 28일에,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가자지구의 주민들을 고의적으로 기아에 빠뜨려서, 법원은 (이번에는 이스라엘 판사 아하론 바라크의 유일한 반대에 의해서 15-1의 투표로) 이스라엘에게 대량학살 협약에 따라 보호되는 팔레스타인인들의 권리를 부인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추가 명령을 내렸다. 

 

팔레스타인 점령지에서 인권탄압 상황과 관련하여 유엔 특별보고관 프란체스카 알바니즈의 합리적이고 타당한 보고서는 약간 더 단호한 결론에 도달하였고, 이스라엘이 실제로 대량학살을 자행하고 있다는 이해를 확립하는데 있어서 또 다른 층을 이루고 있다. 이스라엘 학자인 리 모르데차이 박사의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의 폭력 수준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정기 발간 보고서에서도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세계 각국의 정상들과 정기적으로 국제 문제를 협의하는 콜롬비아 대학교의 경제학 교수 제프리 삭스(그리고 전통적인 시온주의에 대해 따뜻한 태도를 가진 유대인)와 같은 선도적인 학자들은 이스라엘의 대량학살이 당연한 것이라고 말했다. 

 

'로컬 콜(Local Call)'에 실린 유발 아브라함의 보고서와 같이 뛰어난 조사 보고서와, 특히 군대가 표적을 선정하여 암살을 수행하는 데 사용한 인공지능 시스템에 관한 그의 최근 조사에 의해서 이와 같은 비난을 더욱 심화시켰다. 예를 들면, 하마스 여단장 한 명을 빼내기 위해서 군대가 무고한 300명을 살해하고 주거지역 전체를 파괴한 것은 군사적 표적이 민간인 살해가 된 것은 거의 우연이 아니었으며, 가자지구의 모든 팔레스타인인들이 살해 표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것이 대량학살의 논리이다. 

 

알고 있다. 그들은 모두 반-유대인들이거나 자기 혐오적인 유대인들이다. IDF 대변인의 발표가 그들의 마음을 만족시켰으며, 이스라엘 언론은 우리를 위해 짜 놓은 이미지만을 노출시켰으며, 우리 이스라엘인들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다. 마치 심각한 전쟁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사회의 사회적, 문화적 부정 메카니즘에 관해서 끊이질 않는 문헌들이 기재되어 있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이스라엘은 정말 그러한 사회의 패러다임적 사례이며, 이 주제를 다루는 세계의 모든 대학 세미나에서 가르칠 사례이다. 

 

헤이그 법원이 판결을 내릴 때까지는 몇 년이 걸릴 것이지만, 우리는 순전히 법적인 렌즈를 통해 재앙적인 상황을 바라봐서는 안 된다. 무차별적인 살해, 파괴, 대량추방, 난민, 기근, 처형, 문화 및 종교기관의 소탕, (기자 살해를 포함한) 엘리트들의 압살, 팔레스타인인들의 인간성 말살의 수준과 속도가 가자지구 내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의 존재를 고의적이고 의도적으로 분쇄하는 대량학살의 총체적인 모습을 만들고 있기 때문에 가자지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대량학살이다. 

 

우리가 그러한 개념을 통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방식에서 볼 때, 지정학적-정치적-문화적-인간 복합체로서 팔레스타인의 가자지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집단학살은 그 개인들 전부가 아니라, 집단 또는 그 일부를 의도적으로 파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가자지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그 결과는 의심할 여지가 없이 집단학살이다. 이스라엘 정부 고위 관리들의 수많은 말살 선언과 하레츠 칼럼니스트 캐롤라이나 랜드스먼이 정확하게 지적했던 대중 담론의 전반적인 말살 어조는 이것 또한 의도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스라엘인들은 그렇게 보는 것은 대량학살을 대참사로 여겨야 한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기차, 가스실, 화장터, 살처분 구덩이, 강제수용소, 몰살 수용소, 그리고 희생자 집단의 모든 구성원들이 조직적으로 박해를 받아 죽음에 이르는 것을 상상하고 있다. 가자지구에서는 이와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 대부분의 이스라엘인들도 대참사에서 일어난 것과 유사한 방식에서 희생자 집단이 폭력이나 실제 분쟁에 관여하지 않고, 살인자들이 광기어린 무분별한 이데올로기 때문에 그들을 몰살한다고 상상하고 있다. 가자지구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10월 7일의 잔혹한 하마스의 공격은 극악무도하고 끔찍한 범죄였다. 많은 어린이들과 노인들을 포함하여, 850명 이상의 이스라엘 민간인들을 포함해서 약 1,200명이 죽거나 살해당했다. 약 240명의 살아있는 이스라엘인들이 가자지구로 납치되었고, 강간과 같은 잔혹한 행위들이 자행되었다. 이것은 분명히 직접적인 희생자들과 그들의 주변 사람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사회 전체에 다년간 깊고, 재앙적이며, 지속적으로 충격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었다. 그 공격에 대하여 이스라엘은 정당방위로 대응하였다. 

 

그러나, 대량학살은 각각의 경우마다 성격이 다르지만, 살인의 범위와 특징에 있어서는 대부분 진정한 정당방위의 의미에서 관철되었다는 것이 공통분모이다. 법적으로는 어떤 사건이 정당방위와 대량학살이 동시에 될 수 없다. 이 두 가지 법적 범주는 상호 배타적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정당방위는 대량학살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며, 주된 원인이 아닐지라도, 대개 그 주된 원인들 중 하나이다. 

 

국제형사재판소가 두 가지 차원에서 1995년 7월에 대량학살이 일어났다고 구 유고슬라비아에 대해 판결을 내렸던 스레브레니차에서는 16세 이상의 보스니아 무슬림 남성과 청소년 약 8,000명이 살해되었다. 이 여성들과 어린이들은 예전에 추방된 적이 있었다.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군의 공격은 유혈 내전 속에서 발생하였고, 양측은 전쟁 범죄를 저질렀으며(비록 세르비아계가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많이 저질렀지만), 보스니아의 크로아티아인들에 의한 일방적인 결정에 따라 발발하였고, 이슬람교도들이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분리되어 보스니아 독립 국가가 수립되었다(세르비아계는 소수였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박해와 살인이라는 암울한 과거의 기억을 지닌 보스니아계 세르비아인들은 위협을 느꼈다. 어느 쪽도, 죄가 없는 갈등의 복합성으로 인하여 ICC가 스레브레니차 대학살을 당사자들이 저지른 다른 전쟁범죄를 능가하는 대량학살 행위로 인정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이러한 범죄들이 대량학살을 정당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세르비아군이 스레브레니차에 거주하는 보스니아계 이슬람교도의 존재를 살인과 추방, 파괴를 통해 의도적으로 파괴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오늘날 보스니아계 이슬람교도들은 다시 그곳에 살고 있으며, 파괴된 모스크(mosque, 이슬람교 성원) 중 일부가 복구되었다. 그러나, 대량학살은 살인자와 희생자의 후손들을 똑같이 괴롭히고 있다. 

 

르완다의 경우는 전혀 달랐다. 오랫동안 분열과 지배에 기반을 둔 벨기에 식민지배구조의 일환으로, 투치족(Tutsi) 소수집단이 지배하면서 후투족(Hutu) 다수집단을 억압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에 상황이 역전되어, 1962년에 벨기에로부터 독립하면서, 후투족이 국가를 장악하였고 이번에는 구 식민지 열강의 지원을 받아 투치족에 대해 억압적이고 차별적인 정책을 펼쳤다. 

 

이 정책은 점점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었고, 1990년에 식민지배 붕괴 후에 르완다를 탈출한 투치족을 중심으로 하여, 투치족 군대인 르완다 애국전선의 침공을 시작으로 잔혹한 유혈 내전이 발발했다. 그 결과, 후투 정권의 눈에는 투치족이 집단적으로 실제 군사적 적으로 동일시되었다. 

 

전쟁 기간 동안에, 양측은 전쟁이 번졌던 이웃 국가들의 영토 뿐만 아니라, 르완다 영토에서 심각한 범죄를 저질렀다. 어느 쪽도 절대적으로 결백하거나 절대적으로 악하지 않았다. 내전은 1993년에 체결된 아루샤 협정(Arusha Accords)으로 끝났고, 투치족을 정부 기관, 군대, 그리고 국가 조직에 포함시키기로 했다. 

 

그러나, 이러한 합의가 결렬되었고, 1994년 4월에 르완다의 후투 대통령인 쥬베날 하비아리마나가 탑승한 비행기가 격추되었다. 오늘날까지, 누가 비행기를 격추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들은 사실상 후투족 전투기였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후투족은 투치(Tutsi) 저항세력의 소행이라고 확신했고, 이는 곧 국가에 대한 진정한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다. 투치족 대량학살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대량학살 행위의 공식적인 근거는 투치족의 실존적 위협을 영원히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최근에 바이든 행정부가 대량학살로 인정한 로힝야족의 경우는 많이 다르다. 당초에, 1948년에 미얀마(옛 버마)가 독립한 이후, 무슬림 로힝야족은 동등한 시민이었으며 대부분 불교 국가 실체의 일부로 여겨졌다. 그러나, 수년에 걸쳐, 특히 1962년에 군사독재정권이 수립된 이후, 버마족 민족주의는 로힝야족을 제외하고, 몇몇 지배적인 민족집단(주로 불교 신자)과 동일시되었다. 

 

1982년과 그 이후에, 시민권법이 제정되었고, 대부분의 로힝야족의 시민권과 권리가 박탈되었다. 그들은 외국인으로 간주되었으며 국가의 존재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과거에 소규모 반군 단체들 중에서 로힝야족은 폭력적인 저항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2016년까지 많은 이들이 그들의 권리 박탈, 억압, 국가 및 폭도의 폭력에 대한 복종, 그리고 점진적인 추방을 막을 수 없다고 느꼈으며, 로힝야족의 지하 운동 세력이 미얀마 경찰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 대응은 잔혹했다. 미얀마 보안군의 습격으로 대부분의 로힝야족이 마을에서 쫓겨났고,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으며, 그들의 마을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2022년 3월에 안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이 워싱턴 홀로코스트 박물관에서 로힝야족에게 자행된 일이 대량학살임을 인정하는 성명을 낭독했을 때, 2016년과 2017년에 약 85만 명의 로힝야족이 방글라데시로 추방되었고, 그들 중 약 9천 명이 살해되었다고 말했다. 미국이 로힝야족에게 자행된 일을 대참사와 별개로 대량학살로 보는 여덟 번째 사건이었음을 인식하기에 충분했다. 로힝야족 사건은 대량학살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이 연구 측면에서 확립한 것을 상기시켜 주었으며, 가자지구의 경우와 많은 관련이 있다: 즉 인종 청소(ethnic cleansing)과 대량학살(genocide) 간의 연결고리이다. 

 

두 현상 간의 연관성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두 가지 모두가 가자지구와 관련이 있으며, 가자지구 인구의 대다수가 거주지에서 추방되었고, 이집트가 팔레스타인인들을 대량으로 자국의 영토에 수용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그들을 가자지구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한편으로, 인종 청소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타협 없이, 적의 집단을 제거하려는 의지를 나타내고 있으며, 쉽게 대량 학살에 빠져들거나 그 일부가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인종 청소는 보통 희생자 집단을 부분적으로 또는 완전히 말살하거나 유발하는 조건(예: 질병 및 기근)을 만든다. 

 

가자지구의 경우에, '안전한 피난처'가 종종 죽음의 덫과 고의적인 말살 지역이 되었으며, 이스라엘은 이러한 피난처에서 의도적으로 피난민들을 굶주려 죽게 하였다. 이 때문에 인종 청소가 가자지구 전투의 목표라고 믿는 논평가들이 꽤나 많이 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아르메니아인들의 대량학살도 그러한 맥락을 가지고 있다. 오스만제국의 쇠락기에, 아르메니아인들은 그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확립하고 민족자결권을 요구했다. 오스만 당국이 보기에 그들은 서로 다른 종교적, 민족적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오스만제국과 러시아제국의 국경에 위치한 전략적 위치 때문에 위험한 집단이 되었다. 

 

19세기 말 초장기에 아르메니아인들에게 끔찍한 폭력 사태가 일어났으며, 일부 아르메니아인들은 러시아인들에게 진정으로 연민을 가지고 있어서 그들을 잠재적 해방자로 생각했다. 심지어 아르메니아계 러시아인 소수 단체들은 러시아군과 협력하여 투르크(Turk)에 맞서 국경 너머에 있는 그들의 형제들에게 합류를 요구해서 오스만 정권의 눈에 실존적 위협감을 증폭시켰다. 제국의 심각한 위기 속에서 전개된 이러한 위협감은 아르메니아인의 대량학살로 발전시켰고, 또한 추방의 과정도 시작되었다. 

 

20세기 최초의 대량학살도 독일 정착민들이 남서아프리카(현재의 나미비아)의 헤테로족과 나마족에 대항하여 정당방위의 개념에서 행해졌다. 독일 정착민들의 극심한 탄압으로 인해 현지인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잔인한 공격으로 약 123명의 (아마도 더 많은) 무장하지 않은 사람들이 살해당했다. 수천 명에 불과하던 작은 정착민 사회에서 위협감은 현실이었고, 독일은 원주민들에 대해 억제력을 잃었다고 우려했다. 

 

그 반응은 인식된 위협에 따른 것이었다. 독일은 통제불가한 지휘관이 이끌고 있는 군대를 보냈고, 그곳에서, 또한 정당 방위의 개념으로, 1904년과 1908년 사이에 이 부족민들의 대부분이 살해당했다. 일부는 직접 살해함으로써, 일부는 독일인들에 의해 강요된 굶주림과 갈증의 상황에서, 그리고 일부는 잔인한 수용소와 노동 수용소에서 살해당했다. 유사한 과정들이 북미의 토착민들 추방과 몰살 기간 동안에, 특히 19세기에 발생했다. 

 

이 모든 사건에서 대량학살의 가해자들은 어느 정도 정당한 실존적 위협을 느꼈고, 이에 대한 대응으로 대량학살이 이루어졌다. 피해자 집단의 파괴는 정당방위 행위에 반하는 것이 아니었고 정당방위라는 진정한 동기에서 비롯되었다. 

 

2011년에 남서아프리카의 대량학살에 관한 짧은 기사를 하레츠(Haaretz )에 실었으며,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문화적, 인종적 우월감에 기초한 식민지 지배가 어떻게 지역의 반란 앞에서 대량 추방, 인종 청소, 대량학살과 같은 끔찍한 범죄로 파급될 수 있는지를 헤로와 나마의 대량학살로부터 배울 수 있다. 헤로의 반란 사건은 역사에서 나크바를 이미 알고 있는 여기 이스라엘의 우리들에게 소름 끼치는 경고 신호로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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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rica is a Cou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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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os Goldberg

아모스 골드버그(Amos Goldberg)는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 유대인 역사 및 현대 유대인학과의 홀로코스트 역사 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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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 Salbe (Translation)

Sol Salbe는 중동 뉴스 서비스(Middle East News Service)의 저널리스트, 미디어 모니터 및 번역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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