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bscribe to our weekly newsletters for free

Subscribe to an email

If you want to subscribe to World & New World Newsletter, please enter
your e-mail

Defense & Security

코소보와 세르비아: 전쟁에서 부패로

플래그 채우기가 있는 세르비아와 코소보 지도

Image Source : Shutterstock

by Juan Antonio Sacaluga Luengo

First Published in: Jun.07,2023

Jul.28, 2023

코소보 전쟁은 유고슬라비아 (이하 유고)를 멸망시킨 일련의 전쟁 중 마지막 전쟁이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1945년 이후 유럽 대륙에서 유례가 없는 파괴 과정을 거쳐 세르비아를 패배자로 결정지은 것은 유고슬라비아 분쟁이었다. 유고슬라비아 연방 대통령인 티토가 사망한 후 통합된 공산주의 체제였던 유고슬라비아에 찾아온 위기는 소련식 체제(유고슬라비아는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소련 체제의 일부가 아니었음)를 도입한 유고슬라비아에 나타난 말기적 마비 증상과 동시에 일어났다. 전투적 민족주의는 지도자 티토와 지도력을 잃은 유고슬라비아인들을 동원하는 기준점으로서 자유 민주주의보다 우세했다. 많은 공산주의 지도자 뿐만 아니라 반체제 인사와 반대자들도 ‘신흥 민족주의’로 개종했다.

 

서구의 역사책과 정치적 언어는 세르비아 지도부를 유고슬라비아 비극의 주범으로 지목하는 경향이 있지만, 진실을 따져보면 다른 이들도 이 비극에 결코 무죄를 받을 수 없다. 유고 연방군의 친(親)세르비아 성향(대부분의 장교가 세르비아인임)은 이러한 서구 편향된 분석을 부분적으로만 설명할 뿐이다. 세르비아의 명백한 군사적 우월성은 다른 소수 민족 사이에서 피해자 코스프레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었으며, 이러한 피해자 코스프레는 미디어를 통해 퍼지고 이후 보다 신중한 서방의 입장을 변경시켰다.

 

코소보에서는 세르비아인의 책임이 크다는 인식이 보다 강했다. 왜냐하면 코소보는 유고 연방 소속 공화국이 아니라 세르비아의 한 주에 불과했고 또 알바니아계와 이슬람계 인구가 대다수였기 때문이다. 1980년대 초 코소보에서 민족 간 대결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밀로세비치 세르비아 대통령이 코소보에서 일어난 알바니아인의 무장 반란을 잔인하게 진압하였고 이에 대해 나토군이 폭격으로 대응한 결과 세르비아 정권이 몰락하게 되어 세르비아의 패배가 확정되었다. 

 

코소보의 독립에 대한 서구의 지지는 결코 만장일치가 아니었으며(스페인은  코소보의 새로운 국가 창설을 인정하지 않은 국가 중 하나임) 코소보 전쟁이 끝난 이후 25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논란이 남아 있다. 세르비아에 반대하는 코소보 알바니아인의 게릴라 조직이었던 코소보 해방군(UCK)은 세르비아인이 자행한 범죄에 버금가는 과잉 행동과 범죄를 저질렀다. 이전 유고슬라비아 전쟁에서 나타난 조작, 속임수, 거짓, 단순화의 요소가 모두 코소보에서 복제되었다.

 

거의 25년 동안 코소보인들은 결코 쉬운 삶을 살지 못했다. 왜냐하면 세르비아의 집단적 상상력은 세르비아를 국가의 요람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가장 신성한 영토인 국토의 일부 (즉, 코소보)의 분리를 결코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북쪽의 맥박

코소보 북부 지방의 다수 세르비아인들은 2013년에 합의된 자치권이 10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보장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화가 나서 지방선거를 보이콧하기로 결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소보 당국은 선거 절차를 강행했다. 투표율은 4%에도 미치지 못했다. 5월 말, 서로 다른 정당 출신의 코소보 알바니아계 의원 5명이 급히 취임했지만 이들은 시청 밖에서 세르비아 활동가들의 엄청난 반대에 직면했다.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고, 영국 BBC의 보도에 따르면 코소보 국제평화유지군(KFOR) 소속 군인 약 40명이 공격적인 코소보 알바니아계 경찰로부터 시위대를 분리하려다 부상을 당했다.

 

긴장 고조 위험이 커지자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숄츠 독일 총리, 보렐 유럽연합 외교, 안보 담당 대표는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세르비아와 코소보 지도자들에게 압력을 가했고 세르비아가 수용할 수 있는 조건에서 선거를 다시 실시할 것을 촉구했다. 코소보 당국은 이를 즉시 수용했다.

 

미국은 추가 조치를 취했다. 코소보 주재 미국 대사인 Hovenier 는 코소보가 다가오는 군사 훈련에 참가할 수 없다고 발표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코소보가 아직 외교적으로 승인받지 못한 국가들로부터 승인을 받고 또 국제기구로 통합되도록 돕기 위한 미국의 모든 노력을 중단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그러나 미국이 코소보에 대해 실제 그러한 조치를 취한 경우는 거의 없다. 미국은 세르비아 시위를 진압하는 데 있어서 코소보 국제평화유지군과의 조율 부족에 특히 좌절했다. 미국이 강경한 자세로 나오는 데에는 두 가지 주요 동기가 있다. 하나는 지방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역적인 것이다.

 

현 코소보 총리는 전(前) 알바니아계 반체제인사로 좌파의 저명한 인물인 알빈 쿠르티(Albin Kurti)이다. 그는 외교적 타협은 거의 고려하지 않는 단호한 지도자이다. 반체제 활동을 하던 시절 그는 세르비아 당국의 사면령을 무시하고 사면을 집행하려던 간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감옥을 떠나기를 거부했다. 코소보가 독립한 후, 그는 코소보 민주당과 이전 알바니아계 코소보 해방군 게릴라로부터 물려받은 다른 조직 내의 부패와 권위주의적 경향을 비판하며 이들에 대한 확고한 반대자가 되었다. 쿠르티는 세르비아 당국과 타협하지 않는 세르비아의 적으로 간주되지만, 크로아티아 언론 매체에서 강조한 것처럼 현재 위기와 관련한 그의 확고한 입장은 예기치 않게 세르비아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세르비아 대통령 부취지의 이중 게임

핵심적인 지역 이슈는 이 지역에서 러시아의 가장 강력한 동맹국인 세르비아의 상황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밀로세비치 대통령 집권 이후, 세르비아는 수년간 심각한 불안정을 겪었다. 자유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잠시 친(親)서구 노선을 걸은 후, 신민족주의 성향의 정권이 권력을 장악했다. 본질적으로 밀로세비치 대통령의 후계자들은 그들이 완전히 잃은 적이 없었던 권력을 되찾았다. 현 대통령인 부취지는 이전 정부에서 통신부 장관을 역임했다. 그가 이끄는 정당인 ‘세르비아 진보당’ 은 꾸준히 압도적인 절대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다. 부취지 대통령은 서구의 반대를 저지하고 자유주의 야당 세력 을 위협하며 약화된 좌파를 억압하기 위해 끊임없이 선전과 조작을 사용했다.

 

코소보와 관련하여 부취지 대통령은 불필요한 과잉 조치 없이 민족주의적 입장을 채택했다. 그는 전투적이고 신념에 찬 수사(修辭)를 효과적으로 활용했으며(세르비아-코소보 지구에서도 ‘세르비아 진보당’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유럽 및 미국 측 인사들을 상대할 때는 대화와 협상의 지지자인 것처럼 자신을 포장했다.

 

이러한 부취지의 이중 정책은 결코 허구가 아니다. 이전 밀로세비치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부치지 대통령은 이념적 민족주의자가 아니다. 민족주의는 자신과 그의 동료들을 동원하고 통제하는 도구 역할을 한다. 러시아와 서방 간의 관계 악화에도 불구하고 부취지 대통령은 러시아와 서방 간 합리적인 균형을 유지했다. 그는 지금까지 세르비아의 주요 동맹국인 러시아와 특별한 경제, 에너지 및 무역 관계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세르비아의 유럽 연합 가입도 열망한다. 그는 세르비아의 유럽 연합 가입에 대한 비공식적인 거부권을 극복하기를 애타게 바란다.

 

국내에서 부취지 대통령은 큰 어려움 없이 정치적, 제도적, 사회적 그리고 언론에 대한 지배력을 효과적으로 관리했다. 그러나 최근에 문제가 누적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권위주의적인 경향이 있는 국가에서 자주 발생한다. 특정 조직 소속이나 특별히 확인된 정치적 동기가 없는 개인이 저지른 두 건의 치명적인 총격 사건은 전례 없는 사회적 시위 운동을 촉발시켰다. 이러한 고립적이지만 비극적인 사건들은 오랫동안 억눌렸던 사회적 불안을 불러일으켰다. 공개적 시위가 세르비아 정부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부취지 대통령은 동족에게 실망스러운 보복 대응을 시도했다. 일반 대중은 반란 일보 직전에 있지만 야당이 부취지 정권을 크게 약화시키는 것은 여전히 도전적이고 힘든 일이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는 세르비아의 지도자인 밀로라드 도디크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중앙 당국에 공개적으로 도전한다. 유럽 모니터링 사무소에 따르면 도디크는 지속적으로 세르비아계의 분리 독립을 주장하고 위협하면서 자신의 관할권을 넘는 결정을 내린다. 도디크는 푸틴의 가까운 동맹이지만 부취지 대통령과는 불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한다. 그러나 도디크와 부취지 대통령은 각자 고유한 의제가 있으며 각자의 우선 순위가 항상 일치하지는 않는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와 관련해 세르비아 지도자들의 정치 전략에 영향을 미쳤다. 미국은 러시아와 세르비아 사이에 균열을 만들려고 시도하고 있으며 코소보는 그렇게 할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최근 코소보 위기는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끝난 이후 발칸 반도를 괴롭힌 정치적 쇠퇴를 반영한다. 민족주의자들은 단순히 전쟁에서 민족적 또는 종교적 반대자들에게 승리를 거둔 것만이 아니다. 민족주의자들은 또한 자신의 인구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했다. 이것은 서구의 감독이 무기력하거나 소극적인 동안 유고슬라비아 분쟁 도중 그리고 이후에 등장한 마피아 네트워크와 같은 민족주의자들 간 협력을 통해 달성되었다. 

First published in :

Fundacion Sistema

바로가기
저자이미지

Juan Antonio Sacaluga Luengo

Juan Antonio Sacaluga Luengo 는 공공 라디오와 TV 에서 30년 이상 종사한 언론인이다. 대학에서 저널리즘과 현대 역사를 전공한 그는 현재 RTVE 에서 은퇴했다. 그는 지금 Fundacion sistema 와 여러 디지털 언론사와 제휴하며 활동하고 있다. 그는 2012년 유고 내전에 관한 소설을 출판했는데 소설 제목은 "After the end" 이다.


Thanks for Reading the Journal

Unlock articles by signing up or logging in.

Become a member for unrestricted re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