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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대만-중국 관계에서 ‘민족주의의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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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Published in: May.25,2025
Jun.16, 2025
초록
1996년 미사일 위기 이후 양안 간 긴장이 최고조에 달한 이유는 무엇일까? 2016년 이후 미국-대만-중국 관계가 이처럼 갈등에 빠진 이유는 무엇일까? 본 논문은 흔히 간과되는 요소인 민족주의와 정체성 정치가 이 3국 간 관계의 긴장 고조에 기여하는 요인으로 고려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 나라 모두 국내 지도자들과 엘리트들이 포퓰리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입장과 수사(修辭)에 호소하면서 일반 대중의 비용이 크게 증가했다. 외교 정책 연구는 종종 ‘정치는 물가에서 멈춘다’고 주장하지만, 국내 정치에서 포퓰리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수사(修辭)는 거의 항상 국제 무대로 확산된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와 미국의 글로벌 우위에 대한 편집증이 중국과의 전략적 경쟁에 대한 미국의 접근 방식을 뒷받침하고 추진하는 원동력이다. 중국이 19세기와 20세기 초 100년간의 굴욕을 끊임없이 언급하고 시진핑의 ‘중국몽’을 내세우는 것은 중국이 글로벌 질서에서 ‘정당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원동력인 민족주의적 호소이다. 대만은 민족 정체성을 심화시키고 사회정치적으로 탈중국화를 추진하는 동시에 독립된 민족국가 건설을 추진하고 있는데, 이는 중국이 ‘하나의 중국’ 원칙을 내세우며 대만을 편입하려는 시도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본 논문은 각국 내 민족주의의 역할을 추적하고 분석해, 이 민족주의가 대만 해협을 세계 지정학 및 지경제학의 ‘최대 위험 분쟁 지역’으로 만드는 데 어떻게 기여했는지 살펴본다.
서론
2020년 ‘대만 사태’라는 용어가 국제 사회에 처음 등장하면서 중국과 대만 간 양안 관계의 긴장이 국제 사회가 주목하는 핵심 지표가 되었다(Taylor, 2020). 대만 해협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시점이 미-중 관계가 강대국 간 전략적 경쟁으로 전환된 시점이라는 점도 우연이 아니다. 미국 국방부는 2000년부터 미군의 대만관계법 이행 능력에 대한 연례 평가 보고서에서 오랫동안 ‘대만 비상사태’라는 용어를 사용해 왔다. 하지만 미-중 관계가 악화되고 양안 관계에서의 긴장이 분쟁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우려를 불러일으키면서 비로소 이 용어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국방부, 2000; Wuthnow, 2020).
미-중 양국이 세계 질서에서 서로의 입장을 관철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면서 양안 관계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는 주장이 많다. 이러한 긴장 고조는 부상하는 강대국과 쇠퇴하는 강대국 간의 내재적인 경쟁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레이엄 앨리슨은 그의 저서 『예정된 전쟁: Destined for War)』(하나니아, 2021)에서 이를 가장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앨리슨이 제기한 투키디데스의 함정은 미-중 간 경쟁의 담론에서 지배적인 스토리가 되었으며, 이 개념은 미-중 간 전략적 경쟁에 대한 다소 편협한 분석에 기여했다.
투키디데스의 함정 분석에 영향을 받는 다른 분석들은 ‘중국의 행동을 안보 우려와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대응이라는 관점에서 주도된 것으로 묘사했으며, 이는 국제 사회에서 패권국과 자국의 문명적 신념을 실현하려는 신흥 강대국 간의 권력 투쟁이라는 담론에 힘을 실어주었다(Mazza, 2024; 피터스 외, 2022; 소볼릭, 2024). 이러한 관점의 분석들은 중국을 기존의 규칙 기반 국제 질서를 전복시키려는 파괴적 세력으로 묘사하고 반면, 미국은 중국의 침략에 맞서는 방어자로 묘사하며, 미-중 간 전략적 경쟁이 ‘신냉전’을 야기시켰다고 주장한다(Brands & Gaddis, 2021; Mazza, 2024).
대만 해협에서의 긴장 고조는 이러한 ‘신냉전’의 최전선 역할을 하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미국, 중국, 대만의 3자 관계는 급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미국의 능력을 가늠하는 시금석 역할을 한다(Lee, 2024). 실제 대(對)중국 강경 입장을 보이는 미국과 대만 관리들은 이러한 ‘신냉전’이라는 배경을 적극 활용하여 미-중 간 전략적 경쟁을 독재 국가와 민주주의 국가 간의 경쟁으로 규정하고, 대만의 민주주의를 보호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주장해 왔다(Hung, 2022; Lee, 2024). 대만 정부는 중국의 침략에 맞서 이 섬나라를 지원할 민주주의 동맹을 구축해야 할 필요성을 모색해 왔으며, 담론에서 공통의 가치를 공유하는 같은 생각을 가진 국가들과의 파트너십을 강조해 왔다(Ripley, 2024).
그러나 보다 많은 분석들은 대만 해협에서 고조되는 긴장을 이러한 ‘신냉전’ 시대에서 미-중 간 더욱 심화된 지정학적 갈등의 부산물로 규정하면서 양안 간 긴장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중요한 요인들을 무시한다. 따라서 대외적 요인이 아닌 대내적 요인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고 특히 민족주의와 정체성 정치가 이 세 나라의 삼각 관계의 긴장 고조에 기여하는 요인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홀스티(1980)와 같은 학자들이 국제관계 이론에서 ‘민족주의적 행동의 역할’을 강조한 이후 국제 체제의 특성으로서 민족주의에 대한 관심이 증가해 왔지만, 대만 해협 문제에 대한 현대적 분석 대부분은 여전히 세 당사국의 외교 정책 선택에 있어 국내적 요인, 즉 대내적 압력의 영향을 무시하고 있다. 하지만 국내 지도자들과 엘리트들이 포퓰리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입장과 수사(修辭)에 호소함에 따라 국제 청중들의 입장에 대한 고려가 크게 증가했으며, 국내 정치에서의 이러한 포퓰리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수사는 거의 항상 국제 무대로 확산된다(25쪽).
미국에서는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와 미국 우월주의에 대한 집착이 유행하고 있으며, 이는 미-중 간 전략적 경쟁에서 미국의 접근 방식을 뒷받침하고 추동한다. 반면 중국에서는 중국 공산당이 19세기와 20세기 초 100년간 중국이 경험한 굴욕과 시진핑의 ‘중국몽’을 끊임없이 언급하는데, 이는 중국이 세계 질서에서 ‘정당한 지위’를 차지하도록 이끄는 원동력이 되는 민족주의적 호소이다. 대만에서는 대만의 심화되는 민족 정체성과 사회정치적 영역에서의 탈중국화, 그리고 독립 국가 건설 추진이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른 중국의 대만 영유권 주장과 직접적 충돌을 빚고 있다. 따라서 본 논문은 대내적 민족주의의 역할을 관찰, 분석하고, 이 민족주의가 대만해협을 세계 지정학과 지경제학에서 ‘최대 위험 분쟁 지역’으로 만드는 데 어떻게 기여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민족주의와 국제관계에서의 민족주의 역할에 관한 기존 문헌을 분석하고, 이어 미국, 중국, 대만의 고유한 민족주의가 이들 국가의 정치 엘리트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본다. 이를 통해 이러한 민족주의 간 충돌이 대만해협이 세계 ‘최대 위험 분쟁 지역’으로 부상하는 데 어떻게 기여하는지를 분석하고자 한다.
국제관계에서 민족주의 이해
앞서 언급했듯이, 국제관계 이론에 관한 기존 문헌은 주로 ‘합리적 행동과 물질적, 구조적 요인에 기반한 국제 상호작용 모델, 그리고 선호도 형성과 행위자의 정체성 등 외생적 요인’에 초점을 맞춘다(D'Anieri, 1997, p. 2). 하지만 국제관계에서 민족주의를 연구해 온 이론가들은 ‘미-중 양국 간의 관계가 결코 순탄치 않았다’고 인정하며 (Cox, 2019, p. 249) 따라서 민족주의가 국가를 일관된 행위자로 인식할 수 있게 하는 핵심 요소이고, 민족 국가가 타국과의 상호 관계에서 스스로를 정의할 수 있도록 하는 독특한 성격을 창출한다는 점에서 국제관계 이론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고 주장한다(Kowert, 2012; Waltz, 1959).
국제관계 이론에서 ‘민족’과 ‘국가’가 동등하다고 가정되고, 국가 간 상호작용에서 근본적인 요소로 작용하는 주권 개념화에 민족주의가 내재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민족주의의 역할을 무시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Heiskanen, 2019, 2021). 특히 세계화 시대가 종식되고 ‘국가 안보’와 ‘국익’과 같은 용어가 주류를 이루는 국제관계 시대가 도래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더욱 그러하다(Heiskanen, 2019; Posen, 2022). 현대 국제 사회에서는 국제적 상호작용에서 국가의 주권을 표현하고 보호해야 할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있으며, 이로 인해 민족주의가 국가 간 상호작용을 주도하는 ‘구심력’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Kovács, 2022; Waltz, 1959, pp. 177–178).
민족주의는 민족 국가 간 상호작용과 관계를 정의하는 데 있어 그러한 구심적역할을 할 수 있는데, 그 핵심에는 정치적 정체성의 개념화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 민족주의는 ‘민족 = 국가 = 국민’이라는 원칙의 표현이며, 국민을 하나의 ‘가정된 공동체’ 아래의 국가에 묶어 국가라는존재를 정당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Anderson, 1983; Hobsbawm, 1990, p. 19). 민족 국가를 정의하는 민족주의는 자연적이거나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민족 국가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스스로를 구별하고 차별화할 수 있도록 정체성을 구축하려는 민족주의적 노력의 부산물이다(Connor, 1990; Gellner, 1983; Smith, 1986). 이는 민족주의의 고유한 특징을 만들어내는데, 본질적으로 민족주의는 모두 동일하지만 동시에 필연적으로 개별적으로 고유하다. 따라서 국제 무대에서 민족주의가 국가 간 상호작용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개별적인 고유성과 동일한 보다 광범위한 목표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진다. 중요한 것은 민족주의의 강도 뿐만 아니라 민족주의가 국가 간 상호작용을 규정하는 데 기여하는 국가 정체성의 본질이기도 하다는 것이다(D’Anieri, 1997).
따라서 민족주의와 국가 정체성의 생성과 구성은 미국, 중국, 대만 간 삼각 관계를 분석하는 본 논문의 주요 관심사이다. 민족주의와 국가 정체성에 관한 기존 문헌은 민족주의의 생성에 대한 분석을 제공한다. 민족주의는 비교적 현대적인 현상이다. 전 세계적으로 민족주의의 부상은 근대 국가의 발전을 특징짓는 사회경제적 격변의 직접적인 결과이다(Anderson, 1983; Gellner, 1983). 산업화의 도래는 농업, 상인, 귀족을 분리했던 기존 사회 구조의 붕괴를 가져왔고, 다양한 사회 집단을 민족 국가라는 기치 아래 하나로 묶을 새로운 정체성의 개발을 필요로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민족주의의 형성은 필연적으로 하향식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는 신흥 근대 민족 국가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새로운 정치 엘리트의 요구에 의해 주도되었고, 국어와 국가 교육 제도와 같은 도구를 통해 형성되었다(Anderson, 1983; Gellner, 1983). 민족주의는 민족주의의 일반적인 형태가 동일하고 공통된 정체성의 구조와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에 기반을 둔다는 점에서 허공에서 쉽게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민족주의의 내용은 민족 국가에 거주하는 집단에 특화되어야 했고, 이를 통해 원하는 결과를 도출하는 데 필요한 고유성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따라서 민족주의와 민족 정체성은 그 땅에 거주했거나 민족 국가 건국 당시 존재했던 사람들의 기존 신화와 역사에 기반을 두었다(Billig, 1995; Calhoun, 1997; Smith, 1986). 이로 인해 민족주의는 부분적으로는 민족적이지만 부분적으로는 신화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다음 절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미국, 중국, 대만의 민족 정체성의 내용을 살펴보겠다.
미국 예외주의: 위대한 미국
모든 민족주의와 마찬가지로, 미국 민족주의는 ‘국가를 정당화하고, 이에 소속된 이들을 동원, 통합하여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단결을 증진하고, 이를 통해 미국이라는 주권 국가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Trautsch, 2016, 291쪽). 그러나 기존 역사를 그 기반으로 삼았던 유럽의 민족주의와는 달리, 미국 민족주의는 “고대에 대한 역사적 주장이나 기존의 민족성에 전혀 기반하지 않는 새로운 민족성의 모델”이었다. 그 토대는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넌 기독교 순례자들의 여정과 정착민으로서의 미국의 시작을 신화화하는 데 크게 뿌리를 두고 있었다(Doyle, 2009, p. 79). 메이플라워호를 탄 순례자들의 여정은 ‘구세계’와 ‘신세계’를 가르는 경계선을 형성했으며, 이는 미국을 독특한 국가로 개념화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미국 민족주의는 그 뿌리를 유럽에서 시작된 이주에서 찾을 수 있지만, 이 민족주의의 시작은 특히 미국 독립 혁명과 독립 선언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Doyle, 2009). 미국 독립 전쟁은 새로운 국가를 탄생시킨 13개 식민지의 의식이 하나로 뭉치는 계기가 되었고, 유럽의 ‘구세계’와는 구별되는 ‘신세계’에 새롭게 자리 잡은 미국이라는 신생 국가 탄생을 가져다 주었다 (Commager, 1959; Doyle, 2009). 이러한 구세계와의 구분은 종교적 반체제 인사, 가난한 하인, 그리고 유럽에서 온 다양한 난민들을 위한 피난처였던 미국 식민지의 역사 덕분에 더욱 강화되었으며, 이를 통해 미국 식민지는 영국의 유산을 벗어던질 수 있었다(Doyle, 2009).
그러나 영국 문화의 일부 특정 측면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미국이라는 국가를 구상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식민 지배자들에 반항하면서도 법, 자유, 대의 정부라는 제도에 대한 영국적 신념에 건전한 종교성을 섞어 자신들의 독립 국가를 구축했다. 봉건적 전통과 귀족 제도가 부재했던 상황에서, 이러한 종교성은 ‘구세계’를 특징짓는 사회 혁명 없이 평등을 찬양하는 민족 의식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Lieven, 2012). 이는 미국을 새로운 약속의 땅으로 인식하게 했고, 이는 구세계와 신세계의 구분을 더욱 강화했으며, 토크빌 이후 학자들이 지적했듯이 ‘언덕 위의 빛나는 도시’라는 미국이라는 예외주의적 국가 개념의 탄생을 가져왔다(Lieven, 2012).
이후 서부 개척으로 현대 미국의 지리적 경계가 형성되면서 이러한 예외주의적 인식은 더욱 강화되었다. 영토 매입 과정에서 아메리카 원주민과 스페인 식민 세력과의 갈등 속에서 영토 확장이 진행되면서, 이를 통해 미국의 예외주의는 일종의 선험적 의미를 띠게 되었다(Doyle, 2009; Trautsch, 2016). 독립전쟁과 남북전쟁 사이, 국가 의식 강화의 필요성을 인식한 미국 민족주의자들은 ‘미국인에게는 역사적 사명이 있고, 국가 정체성을 통한 유대 강화는 공동의 운명위에 서있다’는 근본적인 생각에 초점을 맞추며 이러한 영토 확장 사업을 계속했다. 이를 위해서는 세계 역사에서 미국의 미래의 지위를 자연스럽게 영광스러운 것으로 설정해야 했다(Doyle, 2009, p. 86; Trautsch, 2016). 이를 위해 미국의 민족주의자들은 미국의 ‘운명,’ 즉 ‘세계에서 가장 자유롭고, 가장 행복하며, 가장 위대하고 강력한 나라가 될 나라’의 멈출 수 없는 부상(浮上)이라는 서사(敍事)를 내세웠다(Doyle, 2009, p. 88). 북미 대륙 전체를 아우르는 미국의 성공적인 영토 확장과 갈등에서의 승리는 미국이 운명적으로 위대하다는 의식을 굳건히 자리매김하도록 했다. 미국 민족주의는 자유와 제도에 대한 존중이라는 시민적 가치와, 그 위대함을 규정하는 제국주의적 웅장함에 대한 꿈을 모두 아우르게 되었다. 미국은 자유로웠기에 예외적인 존재였고, 승리했기에 예외적인 존재였다.
따라서 미국 예외주의는 1945년 이후 미국이 세계 질서의 최정상에 오르는 것을 쉽게 만들었다. 운명적으로 위대함을 믿었던 미국인에게 세계를 주도하는 지도자의 자리는 당연한 것이었다. 미국 민족주의는 미국으로 하여금 자신의 운명을 믿게 했고, 스스로를 지도자로 선택되었거나 심지어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Lieven, 2012). 크리스톨(1983)이 지적했듯이, 이러한 미국 예외주의는 현대 미국 외교 정책에 자연스럽게 영향을 미쳤다.
애국심은 한 국가의 과거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다. 민족주의는 국가의 미래와 그 특유의 위대함에 대한 희망에서 비롯된다… 미국 외교 정책의 목표는 ‘국가 안보’라는 협소하고 문자 그대로의 정의를 훨씬 넘어서야 한다. 그것은 세계 강대국의 국익이며, 이는 국가적 운명 의식으로 정의된다. (xiii쪽)
미국 민족주의는 미국이 세계와의 상호작용을 바라보는 방식과 태도를 형성하는데 영향을 미치는 데, 이는 미국이 세계 질서의 최정상에 당연히 위치해야 한다는 가정으로부터 시작된다. 미국의 ‘역사적 사명’과 ‘운명’을 신화화하는 것은 미국이 세계의 자연스러운 리더이며, 미국의 국익에는 세계의 리더로서의 지위를 보호하는 것이 포함된다는 패러다임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이는 다른 국가들과의 상호작용에 연쇄 효과를 낳는다. 미국이 자연스러운 리더라면 다른 국가들은 미국의 말에 귀 기울이고 미국의 지도를 받아야 하며, 미국의 우위에 대한 도전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화는 미국의 국익을 떠오르는 중국의 민족주의와 충돌하게 만든다.
중국 민족주의: 중국몽
미국 민족주의와 달리, 현대 중국의 민족주의는 비교적 새로운 현상이다. 사실, 중화 민족이라는 개념화는 19세기에 이르러서야 등장했다. 당시 중국인들은 ‘서구 세계와의 대립으로 인해 발생한 위기 상황에 대처할 현대 중국의 정체성을 만들려’ 했고, 이는 중국인들에게 ‘민족, 국가, 주권, 시민권, 인종을 포함한 이질적 개념을 다루도록’ 강요했다(Wu, 1991, p. 159). 더욱이, 미국 민족주의가 정착민으로서의 존재에 초점을 맞춘 반면, 중국 민족주의는 스미스(1986)가 지적했듯이, 고대에 대한 역사적 주장과 독특한 민족성이라는 의식 모두에 기반을 둘 수 있었다. 중국 민족주의의 뿌리는 분명히 민족상징적이었다.
청나라와 한 제국으로서의 중국의 붕괴를 가져온 1911년 신해혁명은 현대 중국 민족주의의 시작을 알렸다(Townsend, 1992). 이전에는 중국 정체성에 대한 개념화가 ‘중국 문명의 위대한 전통’에 대한 더해 풍부한 문화적 유산에 기반을 두었지만, 서양 식민 세력의 침략으로 중국 대중 사이에 불만이 고조되었고 중국 전통과 서양 민족주의를 결합한 현대적 형태의 중국 정체성에 대한 글이 급속히 늘어났다(Townsend, 1992; Wang, 1988, p. 2; Zheng, 2012). 현대 중화 민족의 아버지로 불리는 쑨원은 삼민주의에서 민족 의식의 형성을 주장하며, 중국 인민을 하나의 통일된 집단으로 규정하고 이를 중화민족(중국 민족 공동체, 즉 중화민국)으로 분류하는 근대 중국 민족주의의 수립을 주창했다(Fitzgerald, 2016; Tan & Chen, 2013; Wang, 1988; Wells, 2001).
1911년 신해혁명이 종식되면서 쑨원을 초대 총통으로 하는 중화민국(ROC)이 수립되었다(Zheng, 2012). 이는 중국이 제국주의에서 국가주의로 전환되는 것을 의미했으며, 중화민족 의식의 결집을 가져왔다. 중국 민족주의의 상징적 뿌리는 이러한 의식 속에 스며들어 있다. 심지어 공화국의 이름인 중화민국(中華民國)조차, 이름 앞 세 글자가 중화민족을 상징하기 때문에 국가가 중화민족에 속해 있음을 강조했다. 따라서 중화 민족주의는 중국 민족주의와 동일시될 수 있으며, 중국 민족의 풍부한 역사와 위대한 중국 문명의 전통을 따르는 추상적인 개념화에 기반을 둔 민족주의로서, 중국 민족주의는 또한 많은 향수에 얽매여 있다.
쑨원과 그의 동료 지식인들은 중국 문명의 문화적 유산에 호소하여 중국 민족주의의 창조를 추진했지만, 이를 서구 제국주의 열강과 청나라 통치자에 맞서는 주권 투쟁에 초점을 맞춘 현대 서구 민족주의 이념과 결합했다. 따라서 이러한 향수는 아편 전쟁부터 1945년까지의 이른바 ‘중국의 굴욕의 세기’ 동안 중국인들이 겪었던 경험에서 비롯된다. 이 기간 동안 중국은 자결권을 위해 투쟁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직전 일본의 침략을 받았다(Fitzgerald, 2016; Townsend, 1992; Zheng, 2012). 제국주의 국가였지만 중국은 위대한 제국 문명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연이은 패배를 겪었고, 이는 청나라를 건국한 만주족을 포함한 여러 외국 세력의 압제 아래 자유와 중화민족의 영광을 갈망했던 중국인들에게 깊은 수치로 여겨졌다.
마오쩌둥이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중국) 건국을 선언했을 때, 중국 공산당의 정통성은 중국 민족주의와 일본을 물리친 공산당의 역할에 그 기반을 두었다. 중국 공산당이 내전에서 승리한 것은 중국 본토에서 쫒겨난 국민당(KMT)보다 더 민족주의적인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Gries, 2020). 공산당의 정통성과 중국 민족주의 사이의 이러한 긴밀한 연관성 때문에 중국 공산당은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민족주의 선전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특히 천안문 사태 이후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졌다(Gries, 2020).
시진핑은 국가주석에 취임한 후에도 중국 민족주의를 활용하여 당의 권력 장악을 공고히 해왔다. 그는 중국의 부상을 국가의 운명으로, 영광스러운 과거를 언급하며, 중국이 세계 강대국 대열에 합류하지 못했던 ‘수모의 세기’를 끊임없이 되짚었다(탄, 2023). 이러한 중국 민족주의는 시 주석의 ‘민족 부흥’ 슬로건으로 새롭게 등장해 한때 위대했지만 서구 식민 지배자들의 약탈에 굴욕을 당했던 중국이 이제 과거의 위엄을 되찾아 ‘중국몽’을 실현하고 있다는 관념을 강화하는 데 일조한다(탄, 2023). 이는 중국이 세계에서 정당한 지위를 차지하여 서방 열강에 맞서야 하는 동시에, 대만이 상기시키는 과거의 굴욕을 계속해서 해결해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준다. 이는 미국과의 경쟁 구도와 대만과의 긴장 고조라는 배경을 조성한다.
대만 민족주의: 탈중국화와 독립
대만 민족주의는 흥미로운 사례이다. 이 글에서 살펴본 세 민족주의 중 대만 민족주의는 가장 최근에 생겨난 것으로, 가장 최근의 현상이다. 더욱이 미국이나 중국과 달리 대만에서는 민족과 국가 사이에 연속성과 일관성이 없다. 대만 인을 통치하고 권력을 행사하는 국가는 두 가지 뚜렷한 정치적 비전을 구체화하고 융합하며, 각각은 별도의 국가 정체성과 연결되어 있다. 바로 중국인과 대만인이라는 개념이다. 중화민국은 ‘중국 역사와 중국 민족주의의 산물’이며, 국민당이 내전에서 패배하고 본토를 떠나면서 대만에 강요된 것이다(Clark & Tan, 2012; Lepesant, 2018, p. 65).
실제 국민당은 장제스와 장경국 정권 하에서 대만에서 혼인 통치를 자행하면서, 대만 국민 대부분, 특히 일제 강점기 시절에 자란 사람들의 기억과 경험과 충돌하는 본질주의적 중국 민족주의를 끊임없이 강요하려 했다(Lepesant, 2018). 이는 대만인이라는 정체성을 중심으로 한 민족 의식의 발전을 직접적으로 저해했으며, 이는 대만 민족주의가 비교적 늦게 형성된 이유를 설명한다. 국민당에 의해 추방된 해외 거주 대만 원주민들은 대만 민족주의와 유사한 이념을 보이기 시작했지만, 이러한 민족주의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와 대만의 점진적인 민주화 이후였다(Chiou, 2003; Clark & Tan, 2012; Wakabayashi, 2006; Wu, 2004).
1980년대 정치적 자유화에 대한 요구가 커지면서, 장징궈 총통은 대만화의 초기 과정을 시작하여 1949년 이전 대만에 거주했던 한족을 자신의 행정부에서도 정치적 직위에 오를 수 있도록 했다(Cabestan, 2005). 이는 대만 국가 건설 과정의 시작이 되었고, 1990년대 초 대만의 민주화와 함께 원주민들을 통합할 수 있는 정체성을 구축해야 한다는 정치적 요구가 커지면서 더욱 가속화되었다(Wakabayashi, 2006). 민주화 과정을 감독했던 리덩후이 총통은 국민당(KMT) 구세대의 기대를 배반하여 대만화 운동을 지지하고, 대만 민족주의 도입을 촉진할 국가 건설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대만 민족주의를 구축하기 위한 리덩후이의 행보는 국회 연설에서 ‘신대만’이라는 국가 정체성 개념을 전파한 것, 그리고 더 구체적으로는 중화민국(ROC)의 명칭을 대만 중화민국(ROC on Taiwan)으로 변경한 것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Chiou, 2003; Jacobs, 2007; Wakabayashi, 2006).
따라서 대만 민족주의는 대만의 복잡한 역사와 분리될 수 없다. 대만 민족주의의 뿌리는 1800년대 후반 일본의 제국주의적 확장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전 대만은 여러 중국 왕조와 접촉했고 네덜란드의 짧은 식민 지배를 받았지만, 청나라가 대만을 방치했기 때문에 일본의 식민 지배는 대만의 근대화를 의미했다(Cabestan, 2005; Wakabayashi, 2006). 또한 일본의 식민 통치는 독립 투쟁에 뿌리를 둔 범(汎)대만적 정체성의 발전을 촉발했으며, 이러한 정체성은 뚜렷하게 반(反)식민지주의적이고 반일적인 성향을 띠었다(Brown, 2004). 이러한 범대만적 정체성은 일본인이 아닌 대만 주민 전체를 포괄했기 때문에 한족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리커창 중국 총리 시절 민주화와 ‘신대만’ 민족 정체성 추진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이러한 범(汎)대만적 정체성은 새로운 민족 정체성 구축의 기반으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이는 독립에 초점을 맞춘 범(汎)대만적 정체성의 측면들이 새로운 대만 민족주의에 포섭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하며, 이는 국민당 통치 하의 대만 국민들의 경험을 통해 더욱 강화되었다(Wakabayashi, 2006). 대만에게 있어 일본의 식민 지배와 1945년 이후 중국 내전의 경험은 대만인의 자아 정체성 발달에 있어 ‘타자(他者)’의 존재를 의미했다(Wakabayashi, 2006). 따라서 대만 민족주의는 무엇보다도 독립 대만을 위한 민족주의였음을 의미한다.
2000년, 당시 야당이었던 민진당 출신의 천수이볜이 총통으로 선출되면서 대만 민족주의는 또 다른 전환점을 맞이했다. 대만 민족주의는 더 이상 리콴유가 주장했던 것처럼 단순히 대만의 독립 주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대만 민족주의와 국가 정체성에 명백히 탈중국화된 측면이 존재했다(Hughes, 2013; Wakabayashi, 2006). 이는 천수이벤 정부의 정책에 따른 것으로, 여기에는 대만의 명칭 수정, 중국 본토와의 통일을 촉진하기 위한 제도 개선, 헌법 개정 시도,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대만에 더 중점을 두고 중국 본토보다는 대만에 초점을 맞추도록 교육 과정의 방향 전환이 포함되었다. 이로 인해 대만의 국가 정체성은 문화적으로는 중국적 요소를 점차 배제하고, 한족, 일본인, 그리고 대만 원주민을 동시에 아우르는 문화적 통합을 고수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Brown, 2004; Hughes, 2013; Wu, 2004). 그러나 이러한 민족주의는 대만과 대만 해협 이웃 국가 간의 불안정한 관계를 야기하는 문제점을 낳았다.
민족주의 간 충돌
이 글은 미국, 중국, 대만 3국 관계의 긴장 고조에서 민족주의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살펴보는 것을 목표로 한다. 민족주의가 서로 적대적이며 갈등을 야기할 수 있다는 생각은 민족주의의 영향을 적절히 반영하는 국제관계 이론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새뮤얼 헌팅턴(1996)은 그의 저서 『문명의 충돌』에서 미래의 세계 갈등은 이념이나 경제적 차이가 아니라 세계화로 인한 문명 간 상호작용 증가로 인한 문화적, 문명적 분열에 의해 주도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헌팅턴(1996)은 급속한 경제 발전에 힘입어 부상한 공세적인 동아시아가 미국이 주도하는 서구 문명과 점차 갈등을 겪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문화적 가치와 지정학적 목표의 차이 때문이다.
헌팅턴의 주장이 지나치게 단순화되어 특히 9/11 테러와 테러와의 전쟁 이후 문명 간 갈등을 심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의 기본 전제는 민족주의가 미국-중국-대만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는 흥미로운 출발점을 제공한다. 헌팅턴은 다가오는 갈등이 문명 간 경계를 따라 전개될 것이라고 보고 문화적 유사성과 친밀감이 전 세계 국가들의 집단화를 초래하여 서로 갈등을 야기할 것이라고 가정했지만, 최근 사건들은 그렇지 않음을 증명했다. 실제 도널드 트럼프가 2025년 1월 대통령 취임과 동시에 캐나다 수입품에 25%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위협한 사례는 민족주의가 미국과 캐나다처럼 긴밀하게 연결되고 동맹을 맺은 국가들 사이에서도 문화적 친밀감을 쉽게 압도할 수 있음을 일깨워준다(Hale, 2024).
근대화의 도래는 민족 국가 내에서 민족주의의 부상을 가져왔고, 민족 국가 존재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각각의 민족주의는 개별적으로 고유한 것으로 선전되었다. 따라서 하나의 문명이 오늘날 세계를 완전히 규정하는 분열은 아닐 수 있지만, 민족주의는 헌팅턴의 이론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 다룬 미국, 중국, 대만의 고유한 민족주의를 고려할 때, 이들 삼각 관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정반대되는 민족주의에서 비롯된 갈등, 즉 ‘민족주의의 충돌’로 보인다. 그림 1은 미국, 중국, 대만의 민족주의 간의 상호작용을 요약한 것이다.
그림 1. 민족주의 간의 상호작용
미국은 모범적인 국가이자 세계의 리더라는 보다 높은 소명을 중심으로 국가 정체성을 구축해 왔으며, 세계 질서의 최상위에 있는 자신의 위치를 신성불가침으로 여긴다.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라는 개념이 이토록 많은 주목을 받은 이유는 미국이 어떠한 악재에도 불구하고 냉전 종식 이후 구축한 세계적 패권이 도전받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인식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Mazza, 2024). 그러나 중국이 급속한 경제 성장에 힘입어 부상하고 2007-8년 금융 위기를 비교적 무사히 극복한 사실은 중국 공산당에게 자신들의 시대가 마침내 도래했다는 믿음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시진핑 주석이 국제 무대에서 중국의 공세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기반으로 중국 민족주의를 내세우려는 열망에 힘입어, 세계는 이제 중국이 강대국처럼 행동하고 지역 패권을 요구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다(Mazza, 2024).
그러나 중국의 지역 패권은 미국과 직접적인 갈등을 야기한다. 동아시아에서 지역 패권을 차지하려면 미국이 세계적 우위를 뒤로하고 일본과 한국과 같은 핵심 동맹국이 있는 이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중국에 넘겨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갈등은 서방을 억누르는 중국 민족주의의 반(反)서구적 요소로 인해 더욱 악화되는데, 미국은 서방의 상징이자 지난 세기의 영광을 책임져야 하는 존재인데 반해, 중국은 오랫동안 마땅히 누려야 했던 강대국으로서의 위상을 상실한 존재였다. 중국 속담에 ‘하나의 산에 두 마리 호랑이가 있을 수 없다’는 말이 있듯이, 미국과 중국의 민족주의는 자신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위대함의 운명을 성취하는 데 집중하는 사이, 이는 자연스럽게 서로 간 갈등을 야기하고 이는 그림 1에 잘 반영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그림 1은 중국과 대만의 민족주의가 어떻게 갈등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앞서 언급했듯이, 중국의 민족주의와 ‘중국몽’ 또한 세기의 굴욕에서 비롯된 중국의 수치를 씻어내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굴욕의 일부는 두 차례의 중일 전쟁에서 일본에게 당한 패배에서 비롯되는데, 대만 섬의 상실은 이를 상기시켜 주며, 바로 이러한 이유로 시진핑 주석은 대만과 중국 본토의 통일이 그의 ‘민족 부흥’의 핵심 부분이라고 굳건히 믿고 있다(Sobolik, 2024). 그러나 대만에서는 대만 민족주의의 진화와 발전으로 인해 중국 본토와의 관계를 거부하는 강력한 대만 민족 정체성이 형성되었다. 점점 더 많은 대만인들은 중국 본토와 자신들을 동일시하는 중국 주도의 담론을 거부하고 있으며, 여론 조사에 따르면 점점 더 많은 대만인들이 자신을 중국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Fifield, 2019; Wang, 2023). 이는 두 나라를 갈등의 길로 내몰고 있으며, 전문가들은 대만의 독립이 중국에게는 그냥 넘길 수 없는 레드라인이지만, 어떤 형태의 대만과의 재통일도 대만의 독특하고 독립적인 국가 정체성과 양립할 수 없기 때문에 최악의 시나리오가 점점 더 가까워질 수 있다(Kuo, 2022; Wu, 2004).
반면, 그림 1에서 볼 수 있듯이 미국 민족주의와 대만 민족주의의 관계는 어느 정도 상호 보완적이다. 위에서 미국 민족주의를 설명하면서, 우리는 미국 민족주의가 미국 예외주의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미국의 우월성에 얼마나 기인하는지를 지적했다. 이러한 미국 예외주의는 메시아적 열정을 지닌 것으로 나타났는데, 바드리(2024)는 이것이 1991년 이후 미국의 개입주의적 외교 정책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메시아적 열정은 미국 민족주의를 대만 민족주의의 완벽한 보완재로 만든다. 대만 민족주의는 탈중국화와 독립을 지향하는 동시에, 민주화를 민족주의의 핵심 특징으로 강조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이로 인해 미국은 대만 민족주의 목표의 자연스러운 지지 기반이 되는 반면, 미국의 메시아적 경향은 대만 민주주의를 지지하고자 하는 욕구로 이어진다. 그 결과적 미국 민족주의와 대만 민족주의는 상호 보완적인 존재가 된다.
그러나 중국, 대만의 민족주의가 갈등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대만 해협이 지정학적으로 ‘최대 위험 분쟁 지역’이 된 삼각 관계의 존재를 반드시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 국 정부가 민족주의를 사용할 때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Gries, 2020; Tan, 2023). 2016년 이후, 세 나라 정부는 자국의 의제를 달성하기 위해 민족주의에 점점 더 의존해 왔다(Kuo, 2022; Restad, 2020). 트럼프는 ‘Make America Great Again’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첫 대선 승리를 거머쥐었는데, 이는 미국의 위대함이 그의 정치적 전임자에 의해 약화되었음을 암시했다. 트럼프는 이를 통해 냉전 종식 당시 미국이 얼마나 강력하고 위대한 존재였는지, 그리고 냉전 시대로의 회귀를 갈망하는 보수적인 미국 민족주의에 기반한 포퓰리즘의 물결을 촉발시켰다(렌숀, 2021).
시진핑 주석은 앞서 언급했듯이 중국 공산당의 정통성과 권력 장악을 확보하기 위해 ‘중국몽’이라는 개념을 내세웠다. 그는 과거 중국의 영광을 회복하고, 이를 통해 강대국의 꿈을 현실로 만들어 중국 국민의 삶을 개선하는 것이 중국 공산당의 최우선 과제라고 강조했다(바타차리아, 2019). 2010년대 초 정치적 혼란 이후 중국 민족주의의 부상은 중국 공산당의 입지를 정당화하는 데 이바지했고, 중국인들이 이러한 민족주의를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모습은 점점 더 많이 보게 되었다. ‘전랑(蛇狼) 외교’나 호주, 미국, 영국 등의 대학 캠퍼스에 있는 중국 유학생들이 대만과 홍콩 문제에 관한 의견을 제시하는 교수와 동료들에게 공개적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사례가 그 예이다(Tan, 2023).
대만에서는 차이잉원 총통 집권 당시 민진당이 2014년 해바라기 운동이라는 잔중(反中) 정서를 이용하여 대만 민족주의와 주권 국민으로서 대만의 존재를 각인하고자 하는 열망을 적극 활용해 2016년 대선에서 국민당을 누르고 승리했다(Chen & Zheng, 2022; Clark et al., 2020). 이후 민진당은 선거 승리를 위해 대만 민족주의에 점점 더 의존해 왔다. 왜냐하면 대만 민족주의는 집권 민진당과 야당인 국민당 사이에서 대만/중국 내 갈등을 명확히 드러내는 동시에, 각국 정부가 대만과 중국 본토를 구분하는 담론을 이해하도록 만들어 대만에 대한국제적 인정을 위한 지지를 확보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Lee, 2024).
위에서 설명했듯이 각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국내 의제를 위해 민족주의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 민족주의를 활용하는 것은 민족주의의 열망과 꿈을 실현할 수 없을 때 중대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특히 민족주의에 기반하여 정통성을 구축한 정권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이유로 대만 해협의 긴장이 고조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대만 민족주의는 차이잉원과 민진당으로 하여금 실질적인 독립 없이도 대만 주권을 고수하도록 이끌었다. 그러나 이는 중국 공산당이 제시한 레드라인을 넘는 행동이었고, 중국 민족주의는 군사 활동 강화라는 형태로 대만에 대한 대응을 선택했다. 대만관계법상 대만을 지지하고, 부분적으로는 세계 패권국 지위를 재확인해야 했던 미국은 항행의 자유 수행이나 무기 판매를 통해 대만 해협 상황에 지속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양측이 대만 해협 문제에 대한 외교 정책 대응을 강화함에 따라 각국 정치 지도자들의 부담 또한 커진다. 민족주의 세력이 고조된 상황에서 정치 지도자가 후퇴를 고려하는 모습은 국내 정권의 안정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특히 세 나라 모두에 닥쳐오는 경제적 어려움을 고려할 때 더욱 그러하다.
결론
따라서 미국, 중국, 대만의 삼각 관계는 단순한 권력 투쟁이나 이념 갈등의 산물이 아니라 ‘민족주의 간 충돌’이다. 대내적 압력에 의해 강화된 고유한 민족 정체성의 상호작용은 대만 해협의 지정학적 이해관계를 심화시켰고, 이를 통해 대만 해협을 세계 정치의 중요한 분쟁 지역으로 변모시켰다. 이를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민족주의가 실제로 국제관계 이론에서 국가 간 상호작용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인임을 알 수 있다.
First published in :
Orson Tan은 뉴질랜드 인도-태평양 연구소 연구원이다.
Alexander C. Tan은 뉴질랜드 캔터베리 대학교 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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